R&R에 대하여
글 · 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제일기획
‘늘 해오던 일’과 ‘지금까지 안 해본 새로운 일’이라는 두 가지 옵션을 준다면, 저는 언제나 새로운 쪽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니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성격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실은 워낙 싫증을 잘 내는 성격이다 보니,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느니조금 어렵더라도 새로운 걸 선택하는 편이죠. 덕분에 요즘 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는 ATL이나 디지털 쪽이 아니라 오프라인 기반의 현장 중심 프로젝트거든요. 겉보기에는 같은 ‘제작’ 업무니까 뭐가 그렇게 다르겠냐며 호기롭게 시작했는데, 막상 해보니 너무나 다른 일이더군요. 같은 제작 업무인데 왜 이리 버거운가 싶어 곰곰이 들여다보니, 결국 문제는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있는 R&R(Role and Responsibility)의 차이에서 비롯된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이 R&R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R&R, 일의 기본이자 관성
R&R. 역할과 책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듣고 쓰는 용어 중 하나일 겁니다. 특히 프로세스가 복잡하고 협업이 많은 광고 업계에서는 더더욱 익숙한 단어죠. R&R은 각자 맡은 역할이 무엇인지, 책임의 범위가 어디서 어디까지인지 명확히 하고 공유함으로써 업무상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입니다. 이렇게 글로 쓰고 보면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게 무슨 매뉴얼처럼 어디에 적혀 있거나, 법처럼 강제되는 건 아니잖아요.
대부분의 R&R은 관습처럼 자연스럽게 전수되고 공유됩니다.“광고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차적으로 AE가 맡는다”, “그림은 아트가, 카피는 카피라이터가 정리한다”처럼 누구나 알고 있는 암묵적인 규칙이죠. 물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조율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큰 틀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관성적 프로세스 덕분에 광고는 복잡하지만 동시에 안정적입니다. AP, AE, 제작, 미디어까지 한 회사 안에서도 역할이 다르고, 광고주와 대행사, 제작사, 미디어사의 역할 역시 명확하게 나뉘죠.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충실히 해내고, 그것들이 한데 모여 하나의 광고가 되는 것. 저는 이게 광고라는 일의 매력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요즘
그런데 최근엔, 여러 부분에서 R&R 이슈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프로세스는 점점 복잡해지는데 일할 시간은 줄어들고, 미디어 포맷은 매번 달라지고, 팀 구조까지 수시로 바뀌면서 기존의 R&R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상황이 생깁니다. 예전처럼 암묵적으로 이해되던 역할 구분이 더는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않는 거죠.
제작팀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제안한 아이디어만 봐도 이건 아트가 낸 건지,카피가 낸 건지 한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림으로 생각을 푸는 아트, 글로 풀어내는 카피, 문서를 정리하는 스타일부터 가져오는 레퍼런스까지, 모든 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었죠. 심지어 사무실 자리만 봐도 누가 아트고 누가 카피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니까요. 아트의 자리는 일단 모니터랑 태블릿 등 장비 자체도 많을뿐더러 잡지랑 피규어 등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많고 산만한 느낌이죠. 반면에 카피의 자리는 상대적으로 깔끔하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 그런 분위기거든요. 물론 예외는 있습니다만 대부분 그렇답니다.
이렇게 자리만 봐도 다르고 아이디어 도출방법도 다른 아트와 카피의 차이가 점점 흐려집니다. 아트도 챗GPT를 써서 카피를 써오고, 카피도 미드저니로 이미지를 만들어옵니다. 결과물만 놓고 보면 둘의 구분이 거의 느껴지지 않아요. 상향 평준화일까요? 아니면 하향 평준화일까요? 솔직히 아직은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효율과 속도가 좋아졌다는 점에서는 분명 장점이 있지만, 다들 비슷한 툴과 서비스를 쓰다 보니 결과물도 점점 평이해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거든요.

다양성의 위기, 광고의 정체성
생물학에서 ‘다양성’의 중요성을 강조하잖아요. 다양한 유전자가 많이 섞여야 면역력도 높고, 건강한 다음 세대가 태어나는 거라던데,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고유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며, 서로 다른 관점을 섞는 과정에서 비로소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니까요. 그런데 요즘은 그 다양성이 조금 부족해진 것 같습니다. 생각의 스타일이나 방향이 비슷해지고, 예측 가능한 결과물이 많아지면서 아이디어의 신선도가 예전보다 떨어졌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역시 AI가 있습니다. 이제 아트에게는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보다 좋은 그림을 구별하는 안목이, 카피에게는 문장을 잘 쓰는 능력보다 무엇을 쓰게 할지 디렉션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아트와 카피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 것 같아요.
AI와 R&R의 재정의
이제 여러 부분에서 R&R이 달라질 겁니다. 아니, 이미 바뀌고 있죠. 대행사의 롤도, 제작사의 롤도 재편되고 새로운 직종이 생기고 사라지는 일들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특히 광고처럼 여러 사람이 유기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업에서는 더더욱 그렇죠. 하지만 변화는 이미 왔고, 어쩌면 우리는 지금 그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광고는 늘 변화의 중심에 있던 일이었지만, 지금처럼 ‘역할’의 정의부터 새로 써야 하는 시대는 드물었던 것 같습니다. 이 변화가 모두에게 반가운 것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지금은 우리 업(業)의 R&R 자체를 다시 디자인해 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