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 소년병인데 잘해봅시다
HS Ad 기사입력 2025.01.17 09:12 조회 134
 


건물이 흰색이다. 우리 회사 말이다. 가끔 거대한 백색가전처럼 보인다. 자주 거대한 스타일러처럼 보인다. "멘탈이 탈탈 털려서?" "머리에 스팀 차서?" 꽤나 날카로운 통찰력이시다. 다만 꼭 그런 나쁜 뜻만은 아니다. 헌 옷처럼 들어갔다 새 옷처럼 나온다. 8년을 그렇게 다녔다. 덕분에 오래오래 뽀송하게 다닐 수 있었다. (특허받은 100도씨 트루스팀으로다가)
 
처음이다. 이렇게 한 집단에 오래 소속된 적이 없다. 학교를 길게 다니긴 했다. 없어 보일까 봐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학사 학위증을 따려고 무려 7년을 다녔다. 그보다 오래 다닌 곳이 이곳이다. 푹 빠져 플레이했던 게임도 이렇게 오래 해 본 적 없다. 사랑하긴 하나보다. 고백은 아닙니다만.
 
정체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네놈! 아까는 새 옷 어쩌고 하더니,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조직책임자 님께서 내 SAP을 열고 즉시 [연봉삭감] 버튼을 누를까, 갑자기 식은땀이 나는데. (여러분 농담입니다. 그런 버튼은 없습니다. 아니지? 모르지? 이… 있나?) 사실이 그렇다. 종종 친구들이 새 명함을 들고 찾아와 커피와 디저트를 쏠 때. 내 쪽에선 전에 줬던 명함을 또 줄 순 없으니까. 나와 친구 사이 테이블을 앞에 두고, 희뿌연 계산기만 두드린다.
 
멈춘 건 아니다. 달라졌다. 퇴근이 늦어질라치면 입술부터 '댓발' 나오던 내가 아니다. 팀장님께 당돌한 애교를 피우며, 내일까지 이렇게 저렇게 해볼 테니 집에 있는 고양이 좀 만지면서 하게 해달라! 조를 줄도 안다. 내 아이디어가 버림받았다고 뾰루지를 우지끈 뜯던 내가 아니다. 다른 팀원의 아이디어를 더 좋게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할 때가 더 많다. 미안함의 표시로 프링글스 한 조각을 나눠주는 어른의 여유도 생겼다. 와락 잘못 쏟아져서 2조각이 나오면 2조각을 다 주기도 한다. 대견하다.
 
자진해서 블로그 원고도 쓴다. 주어진 업무만으로 허덕이던 내가 아니다. 물론 실수가 많다. 첫 글부터 맞춤법을 틀리질 않나. 엔터키 누르는 글만 써온 탓에 긴 글의 호흡감을 전혀 못 잡질 않나. (지금도 그래, 너…) 게임 이야기 하나 하는데 오만 잡소리를 다 하기도 하고... 2025년을 기념해 슬그머니 잘릴 줄 알았는데. 지금 이렇게 개발새발 또 쓰고 있다. 무언가 새롭게, 계속, 더, 하고 있다.
 
나아진 듯 정체된 듯, 그 모호한 8년의 시간 어디쯤. 정말 깊게 빠졌던 게임이 있다. 모든 인간이 10년밖에 살 수 없는 세계. 정확히는 10살의 몸으로 태어나 태어나 20살로 죽는 세계다. 소년으로 태어나 소년으로 눈 감는, 어쩌면 낭만적이기까지 한 이 세계엔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소년병의 운명을 짊어진 채로 사는 우리. 이조차 '희망 편'일 때 이야기고. 대다수는 10년 차를 채우지 못하고 전사한다. 갓 태어난 다른 소년병이 그 자리를 대체한다. 


 
『제노블레이드 크로니클스 3』 3rd 트레일러 중에서 / 출처: 한국닌텐도 공식 채널

 
18살 주인공 일행은 2년 뒤 명예로운 ‘전역’을 위해, 오늘도 앞다퉈 적국 소년병을 처단한다. 그러다 19살 또 다른 주인공과 칼을 맞대게 되고. 칼끝에서 새로운 우정을 꽃피운다. 친구의 얼마 남지 않은 ’전역‘을 막기 위해, 20살의 꽃다운 죽음을 막기 위해, 이 세계에 의문을 갖고 흑막을 찾아 나선다.
 
머물고 싶은 마음과 나아가고 싶은 마음. 주인공이 맞서게 된 진짜 적은 모순된 두 마음이었다. 소년병으로 생을 마감할지라도 소년으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눈앞에 무엇이 있을지 몰라도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두 마음 사이에 주인공은 갈팡질팡한다. 하나, 머무는 선택은 좋게 말해 '순환의 세계'고 나쁘게 말해 '정체의 세계'다. 둘, 나아가려는 선택은 좋게 말해 '변화의 세계'이고 나쁘게 말해 '파멸의 세계'이다. 당신은 어느 쪽일까?




『제노블레이드 크로니클스 3』 3rd 트레일러 중에서 / 출처: 한국닌텐도 공식 채널

 
가끔 직장 동료들이 찾아온다. 두둑한 서류뭉치를 들고선, 커피 한 잔 하자고 한다. 작별을 고하듯이 이직을 고하면,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식어버린 커피 앞에서 이직을 축하한다는 말은 공허하다. 절반의 진심만 담겨있으니까. 당신과 계속 함께 일하고 싶어요. 그 절반의 진심은, 말하지 못할 말이니까.
 
우리 계속 여기서 같이 일할 순 없나요? 정체라고요? 순환이겠죠. 제자리에 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건 아니에요.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해요. 발전해야 해요. 어쩌면 더 단단하고 견고한 발전이 필요해요. 하지만 맞아요. 제자리에 있는다는 건 그것만으로 지치는 일이에요. 불안한 일이에요. 변화든 파멸이든 벗어날 용기를 택하셨다면. 이미 굳히셨다면. 응원해요. 저는 당신의 자리를 대체할 누군가와 계속 열심히 일할게요. 대체할 수 없는 당신이라는 동료를 오래 그리워하면서요.
 
따뜻한 커피를 앞에 두고 말하고 싶던 100%의 진심. 그건 조금 길다. 뭐 모든 게 마찬가지 아닐까. 건조하고 명료한 선택 뒤에는 와닿지 못하고 가닿지 못한 수많은 마음의 잔해들이 전쟁의 폐허처럼 남겨질 뿐이다. 18살 소년이자 8년 차 소년병. 아직도 내 게임 속 주인공은 답을 내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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