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생 말년병장처럼 살겠다는 청운을 품고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 웹툰작가 이말년. 그리고 그런 그의 자기애를 탐내면서도 자신에 대한 기대치 때문에 완벽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노션 월드와이드의 윤명진 카피라이터가 만났다. 30대 초반, 어디선가 만났더라면 형 혹은 동생 소리가 절로 나왔을, 수줍으면서도 호기심 많고 패기만만한 두 젊은 크리에이터의 햇빛 쨍한 대담.

안녕하세요, 말년 씨
윤명진 카피라이터(이하 윤) 이말년 씨, 아니 본명인 병건 씨라고 해야 하나? 일단 만나서 반가워요. 역시 소문대로 참 미남이시네요.
이말년 작가(이하 이) 어제 두 시간밖에 못 자서 상태 안 좋을 텐데…. 봐요, 여기 엄청 큰 뾰루지 난 거.
윤 이야, 지금 그 한마디로 안티팬 천 명은 늘었겠다. 대한민국 예비역들로만. 군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왜 필명을 ‘이말년’으로 정한 거예요? 정말 ‘평생 말년병장처럼 살고 싶어서’ 그런 건가요.
이 맞죠. 평생 말년병장처럼 살고 싶죠. 몇몇 사람은 여자인 줄 알더라고요. 딸 좀 그만 낳고 싶은 집에서 태어난.
윤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네. 근데 말년 씨 그림체를 보면 여자라고 상상하긴 힘들지 않나? 참, 새로 업데이트한 ‘대머리 적색경보’ 잘 봤어요. 탈모 왔다고 막 고민하던데, 진짜예요?
이 진짜예요. <이말년 씨리즈>에 실존인물을 기반으로 한 캐릭터를 등장시킨 지는 꽤 됐는데, 어느 정도 사실에 근거하고 있거든요. 가족력에 대머리가 있어서 이젠 ‘그냥 순리구나’ 하고 받아들이려고요.
윤 <패션왕> 작가인 기안84랑 개인적으로 꽤 친분이 있잖아요. 말년 씨 결혼하기 전에 홍대에서 둘이 같이 살기도 했죠?
제가 홍대 살아서 가끔 지나가다 봤었어요. 이번 ‘대머리 적색경보’도 그렇고, 예전에 화제가 된 ‘푸른곰팡이’도 그렇고 기안84가 심심찮게 등장하던데, 사전에 어느 정도 협의가 된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 전혀 아니죠. 그래도 본인이 썩 싫어하는 것 같진 않고 주변 반응이 좋아서 자주 써먹게 되네요. 이 기회를 빌려 기안84의 짝눈은 제가 심하게 오버해서 그린 것임을 밝힙니다.
윤 초창기 <이말년 씨리즈>랑 지금이랑 느낌이 많이 달라요. ‘이말년 변했다’는 팬들도 많고. <이말년 씨리즈>는 내러티브가 거의 없이 에피소드 느낌이 강해서 계속 끌고 가기 힘들 것 같단 생각을 했었어요. 지속성도 그렇지만 인기 많은 웹툰은 단행본을 거쳐서 영화로도 만들어지는데, 이렇게 되면 OSMU(One Source Multi Use) 차원에서도 어렵지 않겠어요?
“개그는 의외성에서 나오는 건데 독자들도 <이말년 씨리즈>에 적응을 했나봐요. 어쩌다 소재가 별로인 것도 있겠지만 나도 사람이니 패턴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예전엔 칭찬반, 욕 반이었는데 지금은 욕밖에 없으니까. 욕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돼요.”
이 흠…. 진짜 너무 어려워요. 매화 새롭게 시작하는 기분? 처음부터 포맷이 이랬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죠. 원래는 올해 <이말년 씨리즈>를 내리려고 했었는데, 네이버 웹툰 담당자가 ‘너무 힘들면 <마음의 소리>처럼 패턴을 좀 바꿔보자’고 하더라고요. 조석 씨도 개그만화였다가 일상 소재 중심으로 바뀐 게 좀 있거든요. 사실 기안84나 부인처럼 주변인물이 웹툰에 등장하는 것도 이런 변화의 일종이죠. 지금은 원래 스타일로 한 편, 일상 소재로 한 편 이렇게 반씩 섞어서 연재하고 있어요. 호불호가 좀 나뉘죠.
윤 부인은 나왔다 하면 말년 씨 뒤통수를 후려치던데. ‘컴퓨터 좀 그만해!’ 하면서.
이 흐흐. 그 부분은 좀 미안하죠. 제 스타일이 워낙 두서가 없으니까, 흐름을 끊으려면 부인 캐릭터밖에 없어요. 실제로는 늘 잘한다고 응원해줍니다.
윤 <마조앤새디>를 보면, 다 사람 사는 이야기인데 그걸 좀 더 희화화하잖아요. 그런 식으로 가면 말년 씨도 좀 쉽지 않겠어요?
이 오히려 더 어렵지요. 제 생각에 제일 어려운 건 ‘일상툰’이에요. 살면서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몇 가지는 있겠지만 일상툰은 쭉, 얇고 길게 가는 게 콘셉트이니까. 소소한 일도 재미있게 뻥튀기 해야겠죠.

‘잘 그린다’는 게 뭔데?
이 아까 물어보려다 만 건데…. 제 그림 어때요? 그렇게 못 그리나.
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누가 말년 씨더러 그림 못 그린다고 해요?
이 아시다시피 제가 디시인사이드에서 떴잖아요. 그쪽이 워낙 소위 ‘병맛’을 좋아하니까, 처음엔 제가 뭘 그려도 무조건 찬양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뜨더니 거만해졌다, 옛날하고 변했다, 그림 연습 좀 해라….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걸 똑같이 그리는 것뿐인데.
윤 왜냐면, 처음 당신 만화 봤을 때 진짜 쇼킹했거든. 말 그대로 쇼킹. 근데 진짜 못 그린 것과 못 그린 듯 잘 그린 그림은 분명 다르다고 봐요. 말년 씨는 명백히 후자지. 그림에 리듬이 있다고 해야 하나? 굳이 비교하자면 우스타 교스케의 <멋지다 마사루> 같은.
이 아, 나 그 만화 되게 좋아하는데! 그죠. 그거 재밌죠. 근데 나중에 나온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는 그만큼은 못 되는 것 같아.
윤 이미 한 번 적응이 돼서 그런 거 아닐까? 처음엔 빵 터져도 여러 번 나오면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이 개그만화의 수명이 3~4년 정도라는데, 제가 그쯤 되거든요. 개그는 의외성에서 나오는 건데 독자들도 <이말년 씨리즈>에 적응을 했나봐요. 어쩌다 소재가 별로인 것도 있겠지만 나도 사람이니 패턴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래도 예전엔 칭찬 반, 욕 반이었는데 지금은 욕밖에 없으니까. 욕은 아무리 들어도 적응이 안 돼요.
윤 설마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변할 생각이 있다든가?
이 …글쎄요…. 앞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하긴 할 테지만, 일방적으로 수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림 역시 취향이니까,
너의 생각도 존중하되 나의 생각도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어요. 어떻게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겠어요?
윤 말년 씨, 그리고 병건 씨는 원래 성격이 그런 것 같네요. 누가 뭐래든 난 내 갈 길을 간다.
이 그죠. 그리고 한마디 덧붙여야죠. 아님 말 고. (웃음)
윤 이야, ‘아님 말고’ 이거 진짜 무서운 건데. 무심함인지 무한긍정의 힘에서 비롯한 건지 헷갈리는데요.
이 무심한 게 맞아요. 엄청 게을러요. 얼마나 게으르냐면 전공이 시각디자인인데 막연히 ‘일러스트 그리는 데구나’ 하고 원서를 썼다니까요. 공부는 곧잘 했던 편이라 차석으로 합격했지만 디자인이 너무 힘들어서 고생했어요. 그러다보니 교수님들도 자꾸 싫은 소리만 하시고, 난 점점 반발심이 생기고. ‘너희들 맘대로 되지 않을걸!’ 하는? 흐흐.
윤 말년 씨는 확실히 자기애가 강해. 나는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거고, 당신은 진짜 자신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것 같아. 트위터만 봐도 그래요.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이렉트로 하잖아요.
이 트위터는 이제 안 하려고요. 커뮤니티 활동도. 나는 그저 시민1의 의견을 낸 건데, 사람들이 자꾸 확대해석을 하니까 피곤해요. 기사도 그렇고. ‘엄청난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사람도 있고, ‘관심병자냐’고 묻는 사람도 있는데 다 아니에요. 성격은 보수적이고, 정치성향은 내가 가난한 소시민이니까 진보일 거고, 옛날부터 쓰던 거니까 계속 이말년 아이디를 쓰는 겁니다.

이말년의 ‘말맛’과 윤명진의 ‘데꼬보꼬’
윤 말년 씨의 무심함, 혹은 자기애를 보면 부러워요. 저도 겉으론 굉장히 나르시시스트처럼 보이는 면이 있는데, 내면의 자존감은 상당히 낮거든요. 그래서 역설적으로 내 것에 더 집착하게 되요.
이 난 광고를 잘 모르지만, 짧은 시간에 노출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건 웹툰과 비슷할 것 같네요.
윤 물론 공을 들여야 하죠. 근데 우린 프로니까, 각자 데드라인이 있잖아요. 누가 큰 콘셉트를 정하면, 카피라이터랑 아트디렉터가 아이데이션 작업에 들어가요. 각자 자기 걸 가져와서 피드백을 주고, 거기서 또 일을 정하고 나누는 시스템이죠.
이 카피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기획자네요. 조그만 기획자.
윤 주로 사람들 귀에 걸리는 말에 대한 고민을 합니다.
이 아…. ‘쉿, 레간자!’ 이런 거요? 전 그 광고가 확 꽂히더라고요. 그 똥차를 그렇게 멋있는 차로 둔갑시키다니.
윤 작년에 제가 한 것 중에 ‘버스 콘서트’가 있어요. 현대자동차에서 아이유랑 이승철, 김범수 등의 가수들이 버스에서 콘서트를 열었는데 그 아이디어를 제가 냈었죠. 그때 쓴 슬로건은 ‘달리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자기 아이디어가 채택되면 뭔가 돌아오는 게 있나요?
윤 없죠. 말년 씨의 창작물은 말년 씨 이름으로 나가지만, 저는 아무리 카피를 잘 쓰더라도 제 이름이 나가지는 않아요.
이 그건 좀 싫을 것 같네요. 내 건데 티가 안 나잖아요.
윤 그래서 말년 씨가 오래오래 만화를 그렸으면 좋겠어요. 자기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웹툰의 기반인 포털사이트가 무너졌을 때의 활로, 내러티브 중심의 한계 극복, 이말년과 이병건의 경계, 이런 것들을 고민해보고 오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이 저는 아직 스스로에게 ‘~가’를 붙이기가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이말년 씨리즈>도 작품이라 부르지 않고, 만화가가 아니라 자꾸만 ‘만화 그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게 돼요.
윤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어요. 데이비드 슈리글리(David Shrigley)라고, 영국에서 가장 핫한 드로잉을 그리죠. 어찌보면 말년 씨랑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그는 전시회를 하는 ‘예술가’죠.
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윤 애티튜드의 차이죠. 내가 나를 웹툰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곤조’가 있는 크리에이터라고 생각하는지의 차이.
이 그러고 보니 요즘엔 ‘글’에 관심이 생겼어요. 글로 재미를 주는 방법.
윤 맞다. 카피라이터들끼리 하는 말 중에 ‘말맛’이라는 게 있어요. 이건 말맛이 있어, 저건 말맛이 없어. <이말년 씨리즈>에는 바로 말맛이 있어요. 그리고 ‘데꼬보꼬’도 있고. 울룩불룩, 울퉁불퉁, 요철을 뜻하는 일본어인데 말에 강약이 있다는 거죠. 들어갔다 나왔다.

이 그죠? 입에 착착 감기죠? 제가 말풍선 안에 있는 대사를 얼마나 계속 고쳐가면서 넣는데요. 야, 이건 아무도 몰라주던 건데.
윤 말년 씨는 그걸 천부적으로 아는 거죠. 말의 텐션을. 그래서 가사를 쓰거나 카피라이터를 해도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아마 차기작을 그리면 연출은 지금처럼 고만 고만하게 나오지 않을까요. 대사 치는 걸 설정해서 삼국지를 패러디할까 해요. 어렸을 때부터 진짜 좋아했거든요, 삼국지.
윤 ‘이말년월드’에도 제법 변화의 바람이 보이는 군요. 그럼 이제 ‘지구멸망’은 그만 하는 걸로!

“아내가 그래요. 좋은 것만 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나쁜 것이 당길 때가 있어요. 인터넷에서 ‘이말년’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악플을 보면 기분이 참 나쁘지만, 한편으론 그 자극적인 맛에 자꾸 보고 싶은 생각도 들어요. 특히 작품이 막히거나 자신감이 없을 때 부정적인 생각, 마이너스 에너지가 오히려 도움을 주는 거죠.” - 이말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