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하고 평화로운
연말 보내세요!
글·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제일기획
두 달에 한 번씩, 벌써 두 해 동안 칼럼을 쓰다 보니 나름 시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 것 같네요. 일이 바쁠 때 원고 마감 메일이 오면 “아 벌써 두 달이 지났나?” 싶다가 조금 한가한 시즌에는 “슬슬 원고 마감 얘기가 있을 텐데 왜 없지?” 이런 식이죠. 여튼 이번엔 짧은 가을도 온 것 같고, (이미 겨울인 것 같기도) 딱히 주제가 될 만한 게 없는 관계로 이런저런 단상들을 두서없이 써보겠습니다.
1. 결혼의 계절
최근 몇 달간 결혼 소식이 많습니다. 꽤 오랫동안 청첩장보다 부고가 더 많은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는데 말이죠. 올가을은 청첩장을 꽤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일이죠. 결혼을 장려하는 편이라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는 중입니다. 다들 어서 결혼하셔요. 아기도 많이 낳으시고요. 주변 유부남, 유부녀들이 ‘싱글이 좋다’고 하는 거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부디 속지 마시길. 결혼생활. 물론 쉽지 않습니다. 몇십 년간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사는 게 쉬울 리가 없죠. 각자 일어나는 시간도 잠드는 시간도, 쉬는 패턴도, 취향도 다를테니 말이죠. 신혼 때 많이들 싸우는 이유가 다 그런 데서 오는 갈등이거든요.
갈등 없는 결혼생활을 하려면 딱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걸 해주는 거보다 싫어하는 걸 안 하도록 노력하는 거. 좋아하는 걸 해주면서 가산점을 얻는 방식이 결혼까지 가는 과정의 룰이라면, 상대가 싫어하는 걸 안 하면서 감점 없이 쌓아온 점수를 지켜내는 ‘마이너스의 게임’이 결혼의 룰이랍니다.
감점은 사소한 데서 생깁니다. 누구나 문제 삼는 거 말고 정말 사소한 거. 양말을 뒤집어서 벗어놓는다거나 양치하고 치약 뚜껑을 안닫는다거나 뭐 이런 사소한 것에서 감점이 발생하는 거거든요. 주로 생활 방식과 가사 활동에서만 상대를 잘 배려해도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답니다. 올가을 결혼하신 커플들 아무쪼록 감점 없이 다들 행복한 신혼생활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어쩌다 집사
어쩌다 보니 한 달 전부터 ‘루이’라는 고양이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집사가 된 거죠. 사연은 이렇습니다. 루이를 키우던 학생이 단기유학을 가게 됐고, 학생의 가족은 고양이 알레르기가 심해서 어쩔 수 없이 임시 보호를 맡겨야 하는 상황. 당근에 글을 올리셨더라고요. 혹시 임시 보호 가능한 집이 있을지.
우리 가족은 고양이를 키워본 적도 없고, 경쟁률도 어마어마해서 안 될 줄 알았었는데 운 좋게 저희가 키우게 됐네요. 여차여차 6개월간의 동거가 시작됐습니다. 살면서 강아지는 서너 마리 키워봤지만, 고양인 처음입니다. 강아지랑 뭐 크게 다를까 싶었는데 이게 아주 다른 생물이더군요.
일단 엄청나게 조용합니다. 물 마실 때도 너무너무 조용해요. 처음엔 물 냄새만 맡고 있는 줄 알았을 정도로 조용합니다. 걸어 다닐 때도, 후다닥 뛰어다닐 때도, 놀아달라고 야옹야옹 말을 걸 때마저도 조용합니다. 심지어 방귀 소리도 작고 귀엽더군요. 강아지의 그 우렁찬 짖음과 에너제틱한 부산함과는 전혀 다른 차분함이 있습니다. 물론 개체별 차이가 있겠지만 고양이는 정말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강아지보다 손도 덜 가는 것 같더라고요. 같이 산책해 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목욕도 거의 안 시켜도 되고, 오래만 아니면 혼자 둬도 무방하고.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반려견에 비해 손이 덜 가는 게 장점인 것 같습니다. 식사할 때 식탁 아래서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것도 없어서 편한 것도 있고요. 하루 대부분을 잠을 자며 보내는 녀석이라 같이 살기 꽤 좋습니다.
단점이라면 털이 엄청나게 날린다, 정도? (뭐 그건 개도 비슷하니 패스하고) 또 뭔가 소통이 안 되는 느낌? 반려견만큼의 애착도랄까 그런 건 없는 것 같습니다. 살짝 킹 받는 건 불러도 안 올뿐더러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거. 분명히 부르는 소리를 들은 거 같은데 쳐다도 안 본다니. 뭔가 서운하고 괘씸하고 그렇더라고요. 몇 달 같이 살다 보니 왜 집사라고 부르는지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독일에선 캔 따개라고 한다더니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밥 줄 때나 본인이 원할 때만 말을 거는 반려동물이라니.
대학 시절 룸메이트랑 이구아나 한 마리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보면 꽤 멋있습니다. 뭔가 공룡같이 늠름하면서 아름답기도 하고, 소리를 전혀 안 내는 동물이다 보니 이 친구도 무척 조용하거든요. 허물을 벗는 동물이라 목욕도 필요 없고, 낮에는 하루 종일 일광욕만 하는 차분한 친구죠. 게다가 호박 같은 채소만 먹다 보니 생각보다 냄새도 없는 쪽이라 여러모로 키우기 좋았었는데 고양이도 좀 비슷한 거 같아요. 뭔가 반려동물이라는 느낌보다는 이구아나나 열대어처럼 보고 즐기는 관상용 반려동물 같은 느낌이랄까?
한가한 주말. 햇살 좋은 창가에 늘어져서 잠자는 고양이를 보다 보니, 문득 일광욕하는 이구아나를 보며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던 대학시절이 생각나더라고요. 그 무료한 시절이 왠지 그립네요. 여튼 고양이는 귀엽습니다. 루이가 워낙 개냥이어서 더 그런 것도 있지만, 암튼 귀엽습니다.
3. 올해의 화두
지겹지만 그래도 올해의 화두라면 AI 아니겠습니까. 광고주분들을 만나도 프로덕션 분들을 만나도 모두 다 AI 얘기죠. 적응의 한국인들답게 벌써 이런저런 AI 업체들도 생겨나고 회사 내 교육도 꽤 활발하게 진행 중입니다. 이제 심심치 않게 AI로 만든 광고물들도 나오고 있고요. 아니다. 이제 AI를 사용하지 않은 광고가 더 적을 수도 있겠네요.
암튼 여차저차 슬슬 이쪽도 전문화되어 가고 작업 단가도 정해지는 분위기입니다. 초반에야 만드는 쪽도, 발주 주는 쪽도 처음이라 단가도 일정도 좀 우왕좌왕했던 것 같은데 이제 정당한 인건비와 제작 기간에 관한 얘기가 오가는 걸 보면 내년 말쯤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들 잘 쓰고 있을 것 같네요. AI에 밀려서 없어지는 일자리도 많겠지만 새로 생기는 일들도 많을 테니 부디 광고 쪽엔 좋은 영향이 됐으면 좋겠네요. 견적과 스케줄도 합리적으로 잘 정리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다들 화이팅.
4. 크리스마스트리
올해는 작년보다 좀 빨리 만들어봤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트리는 결혼 5년 차 쫌에 아이가 태어나고 코스트코에 가서 큰 걸로 새로 샀던 것 같아요. 십 년이 훌쩍 넘게 꽤 오랫동안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행 갈 때마다 사 오는 이런저런 오너먼트랑 깜빡이 전구만 업그레이드되는 느낌이네요. 트리 자체는 크게 바꿀 필요를 못 느끼겠더라고요. 1월 말쯤 되면 장식도 다 거둬 박스에 넣고 트리도 3단으로 분리해서 창고에 넣곤 합니다. 여름이 끝나면 선풍기 챙겨두는 것처럼 말이죠.
생각해 보면 크리스마스용품이라는 거 묘한 거 같아요. 일 년 중 대부분, 거의 열 달 정도는 상자 안에 들어있다가 겨울철 길면 두어달 반짝 꺼내 놓잖아요. 가만 생각해 보면 기분이 묘합니다. 봄부터 여름내 창고 안. 상자 속에서 조용히 있는 트리는 어떤 기분일는지. 뭔가 겨울잠을 자는 곰 같기도 하고 말이죠.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중에 주방용품이나 침구처럼 매일매일 사용하는 물건들도 있고, 일년에 한 번 꺼내긴 하지만 존재감이 확실한 트리나 손님들 오면 한 번씩 꺼내는 교자상 같은 것들도 있죠. 일상적 유용함과 간혹 필요한 특별함. 모두 저마다의 쓸모의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 하다 보니 인간관계도 비슷한 느낌이 있네요. 매일매일 가족처럼 보는 직장동료와의 일상적이지만 친밀한 관계도 있고,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씩 보는 모임이지만 만날 때마다 반갑고 특별한 관계도 있어요. 올해는 좀 부지런하게 많이 만나봐야겠습니다. 연말 아니면 언제 또 보겠어요. 반가운 사람들과 모처럼 소주나 한잔해야겠습니다.
집 앞 고속버스 터미널엔 오래된 지하상가가 있습니다. 터미널과 백화점이 있는 한 블록의 큰길을 따라 두 갈래 길이 꽤 길게 이어져 있죠. 제가 9살 때부터 돌아다니던 곳이니 저한테는 꽤 특별하고 친밀한 공간입니다. 천장도 낮고 좁지만 나름 먹을만한 분식집도 있고, 옷이나 생활용품, 이것저것 재미난 것들도 많이 파는, 아파트촌만 있는 동네의 재래시장 같은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딱히 스케줄 없을 때 가족들이랑 동네 마실을 가곤 하죠.
터미널 상가의 왼쪽, 반포역 방향 쪽엔 생화나 조화를 파는 꽃가게들이 모여있습니다. 일 년 중 열 달 정도는 꽃을 팔다가 11월 초가 되면 크리스마스용품을 파는 곳으로 싹 바뀌거든요. 그때쯤 상가에 가면 아 이제 연말이구나 싶은 마음이 들면서 뭔가 좀 들뜨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캐럴도 들리고 매년 업그레이드되는 크리스마스용품도 구경하다 하나씩 사기도 하고요. 크리스마스 때는 뭐할지 고민도 하고, 소소한 선물도 생각해 보고요.
지난주에도 와이프랑 터미널에서 트리를 구경하다 왔습니다. 벌써 17년째 큰 감점 없이 결혼생활을 잘 이어가고 있습니다. (와이프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사소한 걱정거리는 트리를 꺼내놓은 박스에 넣어 창고에 놓아두고 다들 건강하고 평화로운 연말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광욕하며 늘어지게 꿀잠 자는 고양이 마냥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