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fect Days, Perfect Retirement.
광고계동향 기사입력 2024.10.28 03:18 조회 96
 Perfect Days, Perfect Retirement.

글 ·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제일기획



혹시 올 7월에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라는 영화를 보셨나요? 도쿄 시부야의 공공 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씨의 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감독은 빔 벤더스. 주연은 야쿠쇼 코지. 오 이거 뭔가 있겠다 싶어 날름 극장에 가서 봤습니다.
 
빵 터지는 유머도 없고, 갈등과 해결의 기승전결도 없고, 도심의 총격전도, 러브 신도 없습니다. 등장인물도 몇 명 안 나와요. 그저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이를 닦고 세수하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자판기에서 캔커피 하나 뽑아 카세트테이프로 올드팝을 들으며 출근하는 주인공의 일상을 두 시간 내내 보여 줍니다. 공공 화장실을 꼼꼼하게 청소하는 히라야마의 루틴 한 일상을, 그 사이에 아주 소소하게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보여주는 거의 다큐에 가까운 영화죠.
 
근데 이렇게 잔잔한 노잼의 영화가 나름 선방하고 있습니다. 흥행 성적도 괜찮고 칸 영화제 등 여러 영화제에서 수상도 했죠. 평론가와 관객 평까지 좋더군요. 사실 팩트만 놓고 보면 흥행할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감독과 배우도 거장이긴 하지만 대중적으로 유명한 분들은 아니고 영화의 내용도 위에 얘기한 대로 별거 없는데 이게 은근히 롱런 중인 거 보면 뭔가 사람들 마음을 움직인 부분이 있는 거 같습니다. 물론 저도 인상 깊게 봤습니다. 인생과 삶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더라고요.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는 히라야마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뜬금없이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더군요. 황당하죠.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 대한 영화를 보고선 은퇴에 대한 생각을 하다니. 아마도 히라야마의 단조로운 일상을 보면서 소일거리를 하면서 노년을 보내는 제 모습을 투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여하튼 영화를 보는 내내 은퇴에 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중년의 직장인답게 저 역시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 고민이 많거든요. 물론 지금 당장 은퇴를 준비한다는 건 아니고 (할 상황도 아니고) 하게 된다면 언제가 좋을까, 경제적인 부분은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뭐 그 정도의 막연한 생각 중이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좀 더 구체적인 고민들이 생기더라는 거죠. “은퇴를 하게 된다면 나도 저 히 라야마 씨처럼 루틴 한 일상을 (혹은 더 무료하고 심심한 일상을) 살게 될 텐데 과연 내가 견뎌낼 수 있을까? 저렇게 무료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도 의미를 찾고 삶에 정진할 수 있을까?”
 
아마도 지금 제가 하고 있는 광고라는 직업이 너무 스펙터클 하다 보니 드는 생각 같습니다. 광고가 그렇잖아요.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늘 새롭고, 어렵고, 버겁죠. 그렇다고 또 고통스럽기만 한 건 아닌 게 함정인 거 같습니다. 나름대로의 희열도 기쁨도 있다 보니 이런 하이텐션의 삶을 살다가 단조로운 일상에 넘어갔을 때 나는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근데 또 웃긴 건 저는 오랫동안 ‘조용한 삶’을 동경해 왔거든요. 저기 어디 평창 정도 되는 공기 좋은 곳에서 ‘자급자족형 농민’으로 사브작 사브작 조용하게 사는 걸 늘
꿈꿔왔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닭 모이 주고 두어 평 되는 텃밭에 잡초를 솎으며 오전을 보내고 점심엔 툇마루에서 고양이 옆에 끼고 책이나 보고 음악이나 들으며 남은 하루를 보내는 그런 한량 같은 인생. MBTI로 따지면 제가 I형 인간이라 혼자 있는 걸 좋아하걸랑요. 근데 퍼펙트데이즈를 보고 나니 오히려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야~ 생각해 보니 그렇게 사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조금 다른 얘기긴 하지만 정서에는 고 각성 정서와 저 각성 정서가 있다고 합니다. 짜릿하고 빡센 하이텐션을 추구하는 고 각성 정서와, 아늑하고 조용함을 추구하는 저 각성 정서로 나뉜다고 하는데요.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정서는 당연히 고 각성 정서일 테고 광고라는 직업 역시 고 각성 정서에 가까울 겁니다. 퍼펙트 데이즈가 나름 선방하고 있는 이유도 제가 조용한 농민의 삶을 꿈꾸는 이유도 고 각성 정서의 삶에 지쳐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그만 달리고 조용한 저 각성 정서적 인생을 살고 싶다.
뭐 그런 거죠.
 
저 각성 정서를 이야기할 때 북유럽의 휘게(hygge)라는 라이프스타일 개념을 예로 들더군요. 풀어서 설명하자면 아늑한 집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벽난로를 쬐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라이프 스타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제가 꿈꿔왔던 게 딱 요건데…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또 고 각성의 사회에서 살던 한국인들에겐 쉽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오세요 핀란드’라는 트윗 계정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 핀란드에서 살게 된 유저의 계정인데 처음엔 나름 해맑게 시작합니다. “눈이 많이 오는 핀란드로 오세요” “담벼락에도 사랑이 넘치는 핀란드에 오세요” 뭐 이렇게 시작하다가 점점 어두워지고 심각해지고 우울해지는 트윗으로 변해가더니만 “끝내 난 사라지네 깊은 어둠 속으로 오지 마 핀란드”로 마무리가 되면서 유명해졌죠. (다행히 그 유저분은 한국에서 잘 살고 계시다는 소문이 있던데 부디 사실이길 바랍니다.)
 
여하튼 초고 각성 대한민국에서 빡세게 살던 한국 사람들은 저 각성 정서의 삶을 준비할 시간이 좀 있어야 할거 같네요. 역시 그 어떤 인생도 쉬운 건 없는 건가 봅니다. 나중에 맞이하게 될 저 각성 정서의 삶을 천천히 준비하며 지금은 광고 열심히 해야 할거 같아요. 중간중간 나만의 “코모레비”도 찾아가면서 말이죠.
 
adz ·  9/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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