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반복되는 어려움
임인규 회장의 대학시절 전공은 ‘광고’가 아니라 ‘영화연출’이다. 예나 지금이나 영화계 종사자들은 늘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이 일반적인 현실이었다. 임 회장은 5년 정도 광고회사를 다니면서 자금을 마련하려고 했던 것이 평생 직업이 되었고, 광고 제작에 대한 외사랑으로 37년이 흐르게 되었다. 37년간 임 회장을 광고계에 머물게 한 이유, 광고의 매력에 대해 물어보았다.
“광고일이 힘들지만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작품을 제작했을 때의 뿌듯함, 또 늘 새로운 제품, 유행, 패션과 접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습니다. 제가 광고계에 계속 몸담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사실 IMF 이전만 해도 광고인은 대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불황이 계속되면서 인적자원이 전부인 광고관련 회사들은 인력을 감축하기 시작했고, 인력을 감축하는 마당에 신입사원을 뽑기도 어려워졌다. 이는 자연스레 1인당 업무량 증가로 이어졌고, 광고인은 고된 직업으로 대학생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제작사를 선호하는 대학생들 역시 점점 줄고 있다. 일도 고되고, 인건비를 충당하기 어려운 광고제작사의 힘든 현실을 잘 알기에 88만원세대들은 열정만 가지고 고용이 불안정한 직장을 선택하는데 고민이 따르는 것이다. 호황기와 비교하면 인력이 30%가 넘게 줄어들었다고 하니 지금보다 경력직원이 더 부족해지는 몇 년 뒤가 더 걱정이다.
“지금은 폐업했지만 과거 ‘세종문화’는 CF감독의 사관학교라 불리는 프로덕션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을 키울 여력이 있는 제작사들이 거의 사라진 상태입니다. 회사에서 감독의 연봉을 책임질 수 없기 때문이죠. 저희 광고방의 경우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 같은 건물을 쓰면서 감독 개개인이 9개의 독립법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사정이 비슷한 몇몇 회사들도 저희와 같은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년은 올해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IMF 이후로 지금까지 매년 송년회 자리에서 임인규 대표가 직원들에게 한 말이다. 비단 제작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사전계약서 작성으로 악순환의 고리 끊어야...
광고제작사들에게 있어 가장 큰 해결과제는 사전계약서 작성이다. 광고대행사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광고주와의 결제관행이 선결되기 전에는 해결이 요원하다.
“해외의 경우에는 제작사에 광고제작을 의뢰할 때 반드시 사전계약을 체결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관행상 구두로 계약한 뒤 일을 진행하는 사후 정산 시스템이어서, 실제 제작 후에는 당초 구두합의대로 정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입니다. 그 결과 발생하는 손실금을 제작사가 그대로 떠안다보니 재정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광고대행사와 광고주도 나름대로 사연은 있다. 불황에 어렵게 유치한 광고주에게 제작비에 대한 사전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광고대행사 입장에서 쉽지 않은 일이고, 광고주 또한 같은 비용으로 질 높은 제작물을 얻고 싶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최소한의 정당한 비용, 실제작비조차 인정되지 않는 현실이다.
“물론 이 관행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제작사의 책임도 일정 부분은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고대행사와 광고주가 스스로 마인드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서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반드시 풀어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뿐만이 아니다. 촬영에 투입되는 분야별 스태프들의 인건비는 끊임없이 올라가고 견적서에서 인정받는 인건비는 그에 미치지 못하니 중간에서 제작사가 한 번 힘들고, 이런 입장을 이해해 적은 금액으로 마무리하는 스태프가 또 한 번 힘들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법적장치인 ‘하도급법’*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 시장경제에서 동등한 관계를 의미하는 계약관계 갑과 을이 권력관계로 변질되었을 때 사회는 강자만을 위한 리그가 되며, 상생의 가치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광고에 법칙은 없다. 하지만 원칙은 있다
영화는 예술, 광고는 상업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한다. 임 회장은 ‘광고는 예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한 상행위’라고 말한다.
“광고인 중에는 예술을 전공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술에 대한 가슴앓이를 참 많이 하죠. 후배들 중에 광고를 제작하면서 가끔 예술로 접근하는 신인감독들이 있습니다. 제작 리뷰를 할 때 그런 광고에는 좋지 않은 평가를 하게 되는데 집행 후 화제작이 되고, 판매에도 큰 기여를 하는 것을 보면서 ‘광고에는 법칙이 없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임 회장은 광고에 법칙은 없지만 원칙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판매, 그 다음은 사회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광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전하고자하는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비유를 하나 할까요? 기차역에 가면 역내 아나운서가 멘트를 합니다. 이 때 멘트의 목적은 여행객들이 정확한 시간에 열차를 타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것입니다. 가끔 멋만 부려 알아듣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광고도 똑같습니다. 알기 쉽게, 정확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엄격한 광고관처럼 실제 임 회장의 작품들에는 말하고자 하는바가 정확히 담겨있고, 그 속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 또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인생관도 투영되어 있다. 37년간 광고계에 종사한 산증인이자 광고계 오피니언 리더인 임 회장에게 상생의 가치에 대해 한마디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광고를 시작할 때부터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내가 조금 덜 취하고 함께 길게 가자’는 것입니다. 힘들지만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없습니다.”
[인터뷰,정리 - 김정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