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과거, 오래된 미래
HS Ad 기사입력 2010.10.25 05:15 조회 8374









 
 



글 ㅣ 이주연 (건축평론가·월간 <공간> 편집총괄 이사)

 


건축을 인간사회의 삶을 담는 공간미학으로 이해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이치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물리적, 정신적 환경에 적응하는 삶의 공간을 만들어온 흔적들이 바로 건축의 역사인 셈이다. 그래서 과거 종교가 일상을 지배하던 시기는 신전·교회 등 종교건축을 중심으로 도시가 성장하게 되고, 인간의 지배권력이 강했던 봉건사회에는 왕궁 등의 시설이, 근대 이후 자본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은 자본제에 의한 다양한 양상을 담는 건축들이 삶의 공동체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공존과 재생의 지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삶의 공동체 사회는 자생적으로든 인위적으로든 시간을 머금으며 나날이 변화하며 성장한다. 그래서 도시가 지니고 있는 역사 문화적 환경은 과거 시간의 흔적을 잘 보존하고 그 가치를 이 시대의 일상과 함께 할 수 있는 동시대성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과거 역사문화의 흔적은 단지 보존하고 감상하는 ‘골동’의 가치에 머무르지 않고 공간과 시간이 이 시대의 문화와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현대라는 시간성에 주목하다보면 도시가 시간의 흐름의 따라 발전하고 변화하면서 겪게 되는 문화적 소통과 충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도시의 풍경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처럼 오랜 역사문화적 자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건물이 시간의 간극을 극복하고 이 시대의 문화를 증거하는 건물로 재탄생하거나 ‘죽어있는’ 역사적 흔적들이 재생을 통해 빛을 발하는 사례는 최근 들어 자주 접하는 풍경이 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몇 년 사이 ‘인간적 삶의 공간 만들기’의 여러 생각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화두는 ‘문화환경을 담은 재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요즘 인간 환경의 질과 도시 성장동력의 대세인 ‘재생’은 과거 시간이 이룬 궤적을 따라 그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지속 가능한 삶의 장소가 되게 만드는 지혜의 한 단면이다.


시간의 재생

영국 런던 템스 강변 남쪽 뱅크사이드 지역에 100m 높이의 굴뚝을 둔 거대한 건물이 있다. 이름 하여 테이트모던갤러리. 1947?1963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본디 화력발전소로 쓰이다 1981년 가동이 중지될 때까지 런던 시내의 전력공급을 담당했었다. 발전소 기능을 잃고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던 이 건물은 스위스 건축가들인 헤르조크와 드뮤론(Herzog & de Meuron)의 제안에 따라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터빈 홀과 기관실은 완전히 없어졌지만, 그 대신 현대미술의 여러 면모를 담는 ‘예술저장소’로 변했다. 그러나 미술관 어디를 보더라도 과거의 시간을 그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재생’이다. 시간의 흐름을 공유하는 지혜, 재생은 그런 바탕으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문화다.

파리의 문화적 부흥을 대표하는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인 오르세미술관도 재탄생의 진수를 담고 있다. 당초 1804년 최고재판소로 지어진 이 건물은 오르세궁이라 불렸으나 불타 버리고,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오르세 기차역으로 다시 지어졌으며, 1939년 문을 닫게 된 이후 방치되었다가 1986년 12월 오르세미술관으로 재탄생되었다. 이 미술관은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는 전시 및 다기능 문화예술 공간이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지만 스페인 북부 빌바오 시를 세계적인 도시로 탈바꿈시킨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이 주는 교훈도 의미 있다. 빌바오는 강과 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자연지형의 장점을 바탕으로 예부터 철강업과 조선업이 번성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쇠퇴해 도시의 젓줄이던 강이 ‘죽은 하천’으로 변하면서 침체되었다.

그러다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디자인으로 탄생한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과 그 주변 수변공간의 정비를 통해 새로운 도시로 활력을 찾은 ‘사건’은 도시 재생과 문화도시 등의 화두를 몰고 와 전 세계 도시 전문가와 행정 정책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이른바 ‘명품 도시, 명품 건축’의 대명사가 되었다. 빌바오의 재생은 건축물뿐만 아니라 자연지형의 재생도 도시의 성장동력이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만들어낸 건축유산이 이 시대의 문화로 지속 가능하려면 이 시대의 ‘우리다움’이 담긴 우리 건축의 ‘현재적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시대정신의 발견

우리 사회에서도 이런 기운이 서서히 커가고 있어 주목을 끈다. 우리나라 현대건축의 역사는 이미 서구화를 채택해온 시간의 기록이다. 그게 이제 100년 남짓 시간이 흐르고 있고, 우리에게는 진행형의 현대사다. 그 기록 역시 먼 과거의 역사만큼이나 우리네 사회에서는 소중한 역사다.

그런데 이런 시간의 켜들이 만들어낸 ‘현대의 유적’이 부지불식간에 무감각 상태로 너무도 쉽게 지워지고 파괴되었다. 자본의 논리가 그 어떤 문화적 개념보다 앞서서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탓이다. 이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의식과 가치의 차이를 극명히 드러내고 있는 대목이다. 서울만 하더라도 도심은 온통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과거의 장소적 특성이 강한 서울 정동과 명동에 건축의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 두 지역 모두 우리네 가까운 과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관통하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곳이다.

1895년 정동 덕수궁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재판소인 평리원(平理院)이 들어섰고, 그 자리에 일제강점기인 1928년 애국지사들을 핍박했던 경성재판소가 준공되어 국가 침탈의 대표적 상징 건물로 기능해왔었다. 해방 후 우리 정부는 그 건물에 1개층을 더 올려 대법원으로 사용하다가 대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겨감에 따라 2000년대 들어 외관은 옛 모습을 유지하고 내부를 전시공간으로 꾸며 서울시립미술관으로 활용해오고 있다.

명동에도 예쁜 외형을 갖춘 예술극장이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은 1930년대 지어진 명치좌(극장)로 비교적 장식이 강조되어 보이는 근대건축이다. 이 건물은 지금껏 외관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해오며 1970년대에는 사무실로, 1990년대까지는 증권회사 등 금융권사무소로 쓰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사들여 옛 국립극장의 위용을 되찾고자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이 시대의 ‘우리다움’

그밖에도 서울시청 중축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일제강점기 건물의 재생이나 구 서울역 건물의 문화시설로의 활용, 그리고 과거 경성의대 병원이었다가 국군기무사령부 본부로 쓰던 건물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활용하는 등 우리 사회에서도 가까운 과거의 건축적 질서를 새롭게 재탄생시키려는 시도가 펼쳐지고 있어 주목된다.

시간의 켜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가 시민들의 사랑 속에 성장하면서 지속 가능하려면 그 도시가 지닌 그 도시다움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고 이를 이 시대의 도시환경으로 어떻게 재생할 것인가 지혜를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우리의 삶의 환경이 만들어낸 건축유산이 이 시대의 문화로 지속 가능하려면 이 시대의 ‘우리다움’이 담긴 우리 건축의 ‘현재적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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