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티벌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멋진 아티스트, 공간을 채우는 사운드, 무대 위의 화려한 연출. 모두 페스티벌의 핵심이겠지만, 이것만으론 놓치는 것이 하나 있다. 무대 위가 아닌 무대 아래의 이야기다. 요즘 페스티벌 참가자들은 단순히 무대만 보러 가지 않는다. 공연과 공연 사이, 사람들이 어울리는 시간, 휴식을 취하는 순간, 나를 위한 사진 한 장까지. 이 모든 것이 페스티벌 경험의 일부로 작용한다. 브랜드들 역시 이를 간파해 페스티벌에 다양한 경험을 녹여 넣고 있다. 좋은 음악만큼 경험을 디자인하는 것 역시 중요해진 지금, 관객이 ‘페스티벌에 다녀왔다’고 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 체험할 거리를 만들어주는 것 역시 핵심이다.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현장 화장실을 향기롭게 조성한 러쉬의 ‘프레쉬 워시룸’
(출처: 러쉬)
(출처: 러쉬)
페스티벌 화장실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
이 흐름 속에서 눈에 띄는 브랜드도 있다. 지난 6월, 강원도 철원에서 열린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2025(이하 피스트레인)’에 참가한 김명쾌 씨(가명)는 페스티벌 현장 화장실에서 난데없이 ‘카마(Karma)’와 ‘더티(Dirty)’를 느껴버렸다. 저패니즈 브렉퍼스트부터 단편선 순간들, 김현철, 김민규(델리 스파이스, 스위트피)까지 다양한 출연진에도 열광했지만, 급하게 들이켠 맥주 탓인지 뛰어 들어간 화장실에서 영국 향수 브랜드 ‘러쉬(Lush)’의 제품 향기에 깜짝 놀란 것이다.
러쉬코리아는 올해 처음 피스트레인과 협업했다. ‘마음샤워’ 캠페인의 일환으로 페스티벌 현장에 ‘프레쉬 워시룸’을 설치했다. 페스티벌 리프레시 존에 위치한 화장실 공간에 러쉬의 대표 향인 카마, 그래스, 더티를 테마로 샤워 젤, 비누, 향수를 배치한 것이다. 단순히 ‘우리 냄새 좋습니다’라는 직관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스토리도 함께 담았다. 샤워를 통해 실수나 감정의 잔재를 씻어내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그동안 페스티벌의 야외 화장실은 일종의 필요악에 가까웠다. 멋진 공연을 온종일 즐기는 대가로 불편한 화장실은 감내해야 할 무엇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존의 관념을 뒤집은 캠페인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고, 기분 좋은 인증을 남겼다. 불쾌한 경험으로 여겨지던 야외 화장실을 ‘기분 좋은 전환의 공간’으로 바꾸며, 러쉬는 무대 아래의 순간이 얼마나 강력한 브랜드 접점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페스티벌이 이렇게 쾌적해도 돼? 물론!
공연 자체보다 페스티벌과 관련한 경험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례는 또 있다. 지난해 출범한 ‘아시안 팝 페스티벌(이하 아팝페)’는 페스티벌 마니아들에겐 놀라울 정도의 쾌적함을 선보였다. 보통 페스티벌이라고 하면 글래스턴베리의 진흙탕이나 코첼라의 사막 기후를 떠올리지만, 아팝페는 전혀 달랐다.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열리는 ‘아시안 팝 페스티벌’ (출처: 파라다이스 공식 블로그)
아팝페는 베뉴부터가 5성급 호텔이다. 인천 영종도에 자리한 파라다이스시티 야외무대에서 열린다. 지치거나 용무가 급하면 바로 호텔 로비 화장실로 쏙 들어가면 된다. ‘페스티벌 와서 우리 집보다 깨끗한 화장실을 쓰려니 괜히 미안하다’ 같은 후기가 이어진다. 무대 위 라인업을 우러러보기보다 무대 아래 내 경험을 더 존중하는 문화는 요즘 페스티벌의 주최 측이나 관객 측 모두에게 갈수록 더 중시된다. 다만, 페스티벌의 성격에 따라서 그 결이 조금씩 다르다.
공연은 거들 뿐, 친구들과 즐기는 체험의 현장
우리나라에서 가장 핫한 음악 축제, ‘서울재즈페스티벌(이하 서재페)’을 보자. 여기서 주인공은 핀 조명을 받은 무대 위 가수보다 차라리 셀카를 든 ‘나’다. 밤 깊은 헤드라이너 시간대, 페스티벌에 참가한 필자는 서재페 메인 무대 앞에 펼쳐진 돗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들었다. “아, 이 노래도 이 사람 것이었어?! 대박!” “몰라. 자, 짠! 다같이 짠!”

친구들과 함께 경험을 공유하는 장소가 된 서울재즈페스티벌 (출처: 서울재즈페스티벌 인스타그램)
서재페는 그러니까 어느새 ‘재즈’ 페스티벌이 아니라 내 절친들 데리고 꼭 가야 하는 야외 축제가 된 셈이다. 이 하루, 이 경험은 우리 집에서 멜론을 틀어놓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있다는 인증샷과 정반대에 있다. ‘밖’이고, ‘함께’이며, (어쩌면) ‘유료’의 경험이란 감각까지 포함한다. 오프라인 체험이자 인증샷의 장이기도 하다.
감정의 분출구가 된 페스티벌
지금의 페스티벌 붐에는 팬데믹과 엔데믹도 단단히 한몫 했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마스크와 격리 속에 2, 3년 유폐된 청춘의 파토스(pathos, 끓어오는 감정이나 전율)는 엔데믹과 함께 물밀듯이 분출구를 찾았다.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이하 펜타포트)’이나 ‘그랜드 민트 페스티벌’ 같은 대형 야외 음악 축제는 딱이었다. 실리카겔의 ‘No Pain’을 제창하며 낯선 청춘과 신체를 연결해 기차놀이를 하고, 크라잉넛의 ‘말달리자’가 폭발할 때 온몸으로 슬램을 한다. 야구장이나 미술관에서도 볼 수 없는 이런 오프라인 진풍경은 SNS를 타고 다시 전국의 청춘에게 송신됐고 이 파토스의 도가니탕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아시안 팝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선 김창완밴드 (출처: 아시안 팝 페스티벌)
지난해 아팝페에 출연한 김창완밴드, 리더 김창완은 40여 년 음악 인생에 귀한 풍경을 목도했다. 공연 말미에 관객들이 하나 둘 바닥에 주저앉고 거기 다른 관객들이 합세해 식물 군락 비슷한 모양을 형성하더니 다 함께 10세기 북해의 바이킹이라도 된 듯 가상의 노 젓기를 시작한 것이다. 질주하는 ‘개구쟁이’, 사이키델릭 록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도 아닌 잔잔한 발라드 ‘안녕’에서 말이다.
음악을 듣는 본질을 계승한 페스티벌
전 세계 수억 개의 노래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스트리밍(streaming)의 신세계는 2000년대 후반부터 음악 예술의 정의와 미학을 계속해 바꿨다. 수많은 음악적 경험이 손바닥 안에서 가능해졌지만, 동시에 그 경험의 물결은 의미 없이 흘러가(streaming) 버리며 ‘0’의 경험으로 수렴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인천펜타포트 락 페스티벌 (출처: 인천펜타포트 뮤직 페스티벌 홈페이지)
과거 음악이 주었던 경험을 채워주는 것이 바로 페스티벌이다. 현장의 분위기에 취해 휴대전화마저 놓게 하는 ‘몰입의 경험’, 잠실야구장에서 수천 명의 낯선 이들과 함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누리는 ‘연대의 경험’은 참가자들에게 큰 만족감을 준다. 휴대전화만 내려놓는 것이 아닌, 일상의 짐(load)까지 내려(down)놓는 페스티벌 현장이야 말로 업로드(upload)의 부담마저 무중력으로 띄워 보내는 다운로드(download)의 세상이다. 이런 점에서 거의 공짜로 들을 수 있는 음악을 굳이 큰돈을 주고 오프라인에서 찾느냐는 의문은 자연히 사라진다.
동서고금, 음악과 축제는 쾌락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제 쾌락의 기준치는 바뀌었다. 2020년대 음악 축제의 기획자들은 이제 기본값인 락(樂)의 측면에서 무대 위 못지않게 아래의 경험에 집중해야 한다. 쾌(快)에 으레 수반되는 불쾌(不快)의 경험은 최대한 지워내야 한다. 신기루 같은 의미와 연대의 3차원 랜드마크를 쌓아 올려야 한다. 그렇게 수년 간의 노력 끝에 만들어진 브랜드가 겨우 살아남는다. 불편을 감수하고 스타를 떠받들러 가는 페스티벌은 적어도 2025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임희윤 문화평론가
헤럴드경제와 동아일보에서 15년 넘게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전 세계 곳곳의 음악산업 현장을 취재해왔다. 엠넷 ‘쇼미더머니 2’에 출전했고, 비공인 세계 최초 랩으로 작성된 칼럼 ‘응답하라 희미넴 나는 지금 예민해’를 게재하기도 했다.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임희윤의 US-UK 팝 뮤직’ ‘희미넴의 음악이당’ 등의 음악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현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국립국악원 운영자문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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