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기획 박현정 프로 (박현정 CD팀)
나무들이 푸른 양팔을 넓게 펼치고, 계곡물은 우렁찬 목소리를 콸콸 쏟아낸다. 곤충들은 이리저리 떼 지어 날고, 인간들은 그 어느 때보다 늦도록 깨어 있으며 먹고 마시고 떠든다.
바야흐로 태양의 에너지가 모든 것을 바꿔놓는 계절, 여름이 왔다.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계절의 ‘얼리어답터’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반팔을 꺼낼까 말까 고민할 때쯤, 진작에 탱크톱에 수영복까지 찍고 돌아와 있는 식이니까.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시기에 맞춰 캠페인을 집행하려면,
이른 봄부터 아이데이션에 돌입해서 보고와 촬영, 후반 작업까지 서둘러 마쳐 둬야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여름 준비는 종종 롱패딩과 핫팩이 수반되는 기묘한 계절의 콜라보가 된다.
이렇듯 자의 반 타의 반 철모르고 계절을 앞서 사는 우리에게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제철 아이템이 있으니, 그건 바로 여름휴가.
생각해 보면, 여름 광고를 준비하는 것과 여름휴가를 준비하는 것 사이엔 꽤 많은 공통점이 있다. 예산에 맞춘 플래닝은 물론 근사한 장소 서칭과 사전예약, 이동 동선을 고려한 스케줄표 작성에 화창한 날씨를 기대한다는 점까지. 게다가 아무리 철저하게 준비해도 당일 현장에선 반드시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 또한 빼다 박은 듯 닮아있다.

풀 한 포기 아직 피어나지 않은 이른 봄에 폭염의 여름을 연출하기 위하여 고심 끝에 찾아낸 비밀스러운 로케이션. 촬영 전날까지 눈발이 흩날려 모두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건 안 비밀 (크리스피바바 써머캠페인)
요즘에는 성수기 비수기를 구분 짓는 ‘휴가철’이라는 개념이 예전만큼 또렷하지 않지만,
우리는 모두 알 수 있다. 지극히 본능적으로.
분명 노트북 앞에 앉았고, 카페인은 풀충전 상태인데도 머릿속이 계속 흐릿하다면…
어쩌면 내 창의력이 나 몰래 먼저 휴가를 떠난 게 아닐까? 의구심이 든다면…
‘휴가’를 뜻하는 단어인 ‘vacation’의 어원이 ‘비어있다’를 뜻하는 라틴어 ‘vacare’에서 왔다는 고릿적 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감히 회의 스케줄을 비우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버드대엔 독특한 과제로 유명한 미술사 수업이 있다고 한다. 담당 교수인 제니퍼 로버츠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딱 하나만 선택해서 3시간 동안 감상하라고 지도하는데, 이때 이메일과 전화, 일체의 소셜미디어 사용은 절대 금지라고 한다. 이쯤이면 무엇을 ‘보라는 게’ 아니라 ‘보지 말라는 게’ 숙제가 아닐까 싶다.
최신 트렌드와 레퍼런스를 그 누구보다 먼저 섭렵하느라,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대환장 파티 속에서 온에어 일정을 지켜내느라, 2배속 3배속으로 숨 가쁘게 빨리 감기 하던 우리의 일상에도 이처럼 의도적인 느릿함, 가만히 멈춰보는 슬로 모드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가장 열심히 일한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라고 부른다는데, 멍 때릴 때나 산책할 때 비로소 뇌는 정보를 재조합하고 뜻밖의 연결을 만들어낸다고 하니, ‘노는 게 = 일하는 것’이라는 기적의 논리는 과학으로 입증된 셈.

뻔한 여름이 싫어서 해변 대신 해저 여행, 장거리 비행 대신 동네 골목을 픽한 메타인지 형 여름휴가 (스케쳐스 어패럴 써머캠페인)
뭐든 열심히 하는 한국인들은 잘 놀고, 잘 쉬는 것조차 ‘경쟁력’이라는 말을 붙이는데,
진짜 휴가란 그런 사나운 경쟁심과 뒤처졌다는 조급함을 살짝 옆으로 밀어두는 데서 시작된다.
요즘 어디 어디서 대유행이라는 것, SNS 좋아요 받기 위한 그런 것 말고, 나를 이완시키는, 무해한 것들로만 하루를 채워보자.
아무 알림도 없이 시작하는 아침, 배꼽시계에 맞춰 흘러가는 일과, 슬리퍼 끌며 아이스크림 사러 가는 저녁 산책… 핫플 따윈 없어도 되고, 포토존은 더더욱 필요 없다.
오로지 마음이 시키는 속도대로 이 여름을 자유롭게 스트리밍하면 된다.
한 해의 반환점을 도는 6월의 끝자락-
누구보다 부지런히 여름을 준비했던 우리들이,
누구보다 느긋하게 여름을 즐길 수 있는 시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