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운전자들의
면허 반납 프로젝트
헤이딜러 ‘나의 운전 졸업식’
글 이현성 CD | 사이드킥

그동안 헤이딜러가 작업한 영상들은 미학적으로 굉장히 세련됐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첫 미팅을 앞두고 ‘와! 드디어 비주얼 살벌한 거 하나 시작할 수 있는 건가?’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응? 할아버지? 운전면허 반납?’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죠.
세대 간의 갈등이 심상치 않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 특정 세대를 언급하는 건, 특히나 그것이 광고 캠페인이라면 정말 조심할 것들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 메시지가 개인의 댓글 정도가 아니라 브랜드 차원에서 이뤄진다면 득보다 실을 떠올리게 됩니다. ‘나의 운전 졸업식’ 캠페인은 정말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하는 재료였어요.
그러나 고령운전자들의 면허 반납에 관한 프로젝트라는 이야기를 클라이언트에게 듣고 벌벌 떨렸던 가슴은, 프로젝트 타이틀이 ‘나의 운전 졸업식’이라는 것을 듣고 반전을 맞이하게 됩니다.“이거면 되겠다. 쫄지 말자!”라고 말이죠. 은퇴나 반납 같은 개념이 아닌 ‘졸업’이란 타이틀 한 줄에 리스펙트와 따뜻함이 가득했습니다. 겁낼 필요 없었어요. 타이틀을 믿고 덤벼들었습니다. 이것만 잘 전달되면, 된다! 하고 말이죠.


‘반납’ 대신 ‘졸업’, 따뜻힌 존경의 단어
이제부터 스토리가 그 바통을 이어 나가야 했습니다. 클라이언트 측에서 초기에 잡아준 틀은 라이브된 버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운전 인생이 비주얼로 펼쳐지며 마치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 같은 스토리였죠. 상황만 놓고 보면 일사천리로 쉽게 진행된 것 같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어요. 클라이언트도 저희도 신파로 흘러가는 이야기는 절대적으로 피하려 했고, 마치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업(UP)’의 할아버지가 펼쳐 나가는 귀여운 버디무비같이 풀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마지막 헤어짐이 주는 감동이 더욱 극대화될 테니까요.
그런데 할아버지를 귀엽게 표현하기 위해 지나치게 과장된 상황을 설정할 경우 진정성에서 무너져버리게 되고, 이는 캠페인의 취지에 매우 치명적인 데미지를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일어날 법하면서도 보는 동안 웃음이 나와서 시청자가 할아버지와 자동차를 사랑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것도 1분 안에! 쉽지 않았겠죠? 골목에 끼어버리거나, 혼자만 눈이 쌓이거나, 슈퍼카 옆에서 벌벌 떨거나 등의 상황들이 이런 고민 끝에 추가된 스토리였어요. 정말 어렵게 살아남은.
모델, 자동차, 성우… 찾자, 보물 찾는 사람 마음으로
일반적인 브랜드들이 시니어를 다루는 방식인 눈물과 감동의 폭격이 아닌, 오버하지 않고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 길고 긴 ‘찾기의 여정’이 시작됐습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상황을 찾아내야 했고, 그에 적합한 자동차를 찾아야 했습니다.
특히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할아버지 모델 찾기’가 계속해서 이어졌어요. 우선 사이드킥은 일반적인 어르신 모델은 전부 배제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설정한 몽타주에 적합한 인물들을 따져 나가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자동차를 사랑하실 것, 약간은 고집쟁이 같은 까슬까슬함, 그런데 자기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아이처럼 눈이 반짝일 것 같고, 바지가 약간 커서 허리띠를 끝까지 당길 것 같으며 손발톱을 깨끗이 관리하시고 목욕탕 스킨 냄새가 날 것 같은… 진짜 찾기 어려웠겠죠? 어디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찾으면 결코 닿기 어려운 모델이니까요.
자동차 선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 평범하면 밋밋하고, 너무 튀면 작위적이죠. 클라이언트와 머리를 맞대고 수많은 차를 리스트에 올렸다 내렸다 반복하다, 마침내 ‘구형 프라이드’라는 정답을 찾아냈습니다. 누군가의 첫 차이자, 아버지 세대의 상징같은 차이며, 길 위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싣고 달렸을 법한 차로 구형 프라이드는 최적이었습니다.
자동차를 다루는 브랜드라면 더 세련되고 멋진 차를 보여주고 싶은 게 당연할 텐데, 다소 소박할 수도 있는 프라이드를 주인공 차로 선정하는데 기꺼이 오케이를 해준 클라이언트의 센스도 한몫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민현우 작가와 협업을 결정하게 된 과거 작업물들
마지막으로 우리를 고민되게 했던 건 성우였습니다. 진정성을 생각하면 실제 할아버님의 목소리를 쓰는 게 당연한 수순으로 보였지만, 또 한 편으론 메시지 전달 측면에서 성우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죠. 결국 실제 모델, 시니어 배우, 그리고 재녹음의 연속 등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며 최종적으로 실제 할아버님의 목소리를 사용했습니다. 전문 배우가 아닌 할아버님께 섬세한 감정 연기를 요구하는 건 어려운 작업이었지만, 결국은 진정성 있는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 고생한 만큼의 보람이 충분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약간 할아버지한테 혼나기도 했어요.
”왜 자꾸 같은 걸 시켜 이놈들아!”

어르신들의 위축된 모습이 아닌 세월이 주는 여유와 귀여운 바이브를 잡아내기 위해
초기 참고한 레퍼런스
초기 참고한 레퍼런스
영상만큼 중요했던 사진 작업
이번 캠페인은 단순히 영상으로 시작하고 끝나는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어르신들의 졸업사진을 찍어주는 것이 메인 프로젝트였고 그만큼 포토 작가의 실력이 매우 중요했죠. 이 부분은 헤이딜러 팀에서 이미 점찍어둔 인물이 있었어요. 민현우 작가라는 분인데 필름 감도라든지 이런 부분들도 좋았지만 포트폴리오 중에 시골 어르신들을 귀엽게 찍은 작업들이 있었는데, 그게 참 매력적이었어요.
너무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 패션 브랜드들이 실버모델을 다루는 트렌드를 따르고 싶지 않았거든요. 포마드에 아메카지를 입히며 억지로 젊음을 씌우는 것 같은 문법이 이번 프로젝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클라이언트의 감도가 높으면 이럴 때 참 편안합니다.

수 많은 로케이션 탐사 : 할아버지가 사는 동네에서도
귀엽고 따뜻한 바이브가 느껴지도록 말이나 카피 보다는 질감으로 전하고 싶었음.
귀엽고 따뜻한 바이브가 느껴지도록 말이나 카피 보다는 질감으로 전하고 싶었음.
도파민 중독의 시대를 거꾸로 헤엄치며
솔직히 걱정했습니다. 1초가 멀다 하고 화면이 바뀌고, 쉴 새 없이 자극적인 정보가 쏟아지는 대 도파민의 시대에 이렇게 잔잔한 영상이 과연 통할까. 그것도 60초짜리인데! 빅모델 하나 없이, 눈 돌아가는 비주얼 없이 그저 한 사람의 마지막 운전을 따라가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귀를 기울여줄까 하고 말이죠. 하지만 캠페인이 공개되고 사람들의 반응이 하나둘씩 쌓이는 것을 보며 알았습니다. 좋은 이야기는 여전히 힘이 세다는 것을요.
창작자들이 세상의 입맛에 맞춰 자극적인 것에만 매몰되기 쉬운 요즘, 매운맛없이도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뜻깊은 경험이었습니다. 영상의 제목은 운전 졸업식이지만 사이드킥에겐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볼 수 있던 입학식 같은 프로젝트였달까요. 마지막으로 30초였던 초기의 계획을 지속적으로 반대하며, 제발 그만하라는 이야기에도 이 악물고 60초를 끝까지 가져온 프로덕션 GUT과 이를 받아들여준 헤이딜러 팀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