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가지 광고주 유형
글 · 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일기획

누군가에게 뭔가를 판다고 할 때, 판매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판매하는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구매자’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판다고 할 때, 판매자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판매하는 상품’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구매자’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아닐까 합니다.
아이디어를 파는 우리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아이디어를 듣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의사결정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원하는 아이디어를 팔 수 있는 거죠.
제 경험을 되돌아보자면, CD라는 타이틀을 달고 한동안은 ‘팔아야 할 아이디어’에만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그땐 좋은 아이디어만 만들어내면 당연히 팔린다고 생각했었죠. “좋은 건 누구나 알아본다”, “내가 좋으면 남도 좋다고 느끼겠지”라는 마음이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기준이 제게 맞춰졌던 것 같아요.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아이디어를 다듬었고, 제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발표했습니다.
물론 열심히 했던 만큼 잘 팔렸던 적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답답해하곤 했죠. “이걸 왜 몰라주지?”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CD라는 직책도 익숙해질 무렵,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서서히 깨달았습니다.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아이디어를 잘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하구나. 그때부터 광고주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무엇에 반응하고, 어떤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내릴까?
CD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광고주는 ‘의사결정권을 가진 임원’이 아닙니다. 그 임원에게 아이디어를 제안 하고 설득해야 하는 실무 책임자, 즉 마케팅팀 팀장급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죠.그간 수많은 광고주들을 만나고 관찰한 결과, 몇 가지 뚜렷한 유형으로 나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1. 방향이 뚜렷한 광고주
가장 이상적인 유형입니다. 본인이 원하는 방향이 명확하고, 그에 맞는 가이드를 주며 아이디어를 판단하고 결정권자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는 팀장. 이런 광고주를 만나면 걱정할 게 없습니다. 논의 잘 해서 좋은 광고 만들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이런 분들을 만나는 건 그리 흔치 않습니다.
2. 윗선 취향을 정확히 아는 광고주
다음으로 많이 보이는 유형은 결정권자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해 그가 고를 만한 아이디어를 걸러주는 분들입니다. 예컨대, “B 안은 제 취향은 아니지만, 그분이라면 좋아하실 겁니다.” 라는 식이죠.이럴 땐 저는 실무자의 취향도 반영한 안을 함께 제안합니다. “그럼 선호하시는 방향으로도 하나 더 풀어보겠습니다.” 협업이 꽤 잘 되는 케이스입니다.
3. 본인의 아이디어를 반영하길 바라는 광고주
이 유형은 제작 입장에선 조금 까다롭습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이런 건 어떨까요?” 혹은 “꼭 그렇다는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구성을...” 이런 식으로 본인의 방향을 제안하는 분들이죠. 문제는, 이런 분들에겐 본인이 제안한 안이 실제로 안에 반영돼야 진행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 아이디어가 좋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잘 풀리지 않거나 브리프 방향과 어긋나면 꽤 곤란해집니다. 저는 이럴 땐 일단 최선을 다해 그방향으로 풀어봅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풀리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가장 유사한 대안을 제안하는 편입니다.
4. 손을 꼭 한 번 대야 직성이 풀리는 광고주
위의 유형과 살짝 비슷하지만, 뭔가를 ‘살짝’ 바꾸거나 본인의 터치가 꼭 들어가야 만족하는 팀장님들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께는 완성형 안을 제안하기보다는, 약간의 여지를 남겨둔 안을 제시하는 게 유리합니다.혹은 회의 자리에서 “이 부분이 좀 안 풀리는데, 어떻게 보시나요?” 라는 식으로 상의를 요청하는 것도 좋습니다. 같이 만들어간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핵심이죠.
결국 광고주에게도 아이디어 하나를 선택한다는 건 적지 않은 부담일 겁니다. 수많은 이해관계자와 브랜드의 미래를 생각하며 결정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좋은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사람을 넘어, 그 판단이 더 쉬워지고, 더 자신 있게 느껴지도록 돕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는 ‘함께 결정하는 것’이고, 좋은 광고는 결국 ‘좋은 판단의 결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