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제되는 새도매저키즘
우리나라처럼 방송 연예프로그램이 흘러 넘치는 나라도 또 없을 것이다. 세바퀴, 개그콘서트, 패밀리가 떴다, 1박 2일, 무한도전, 무릎팍도사, 라디오스타, 강심장, 스타 골든벨, 남자의 자격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오죽하면 연예 프로그램이 하나의 장르로 정착됐을까. 무슨 요일이 됐건 간에 TV채널을 돌리다 보면 위의 것 중 하나는 걸려 들게 마련이다.
김홍탁 | 인터랙티브 제작그룹 CD hongtack.kim@cheil.com
이들 프로그램의 특징은 가수?연기자?개그맨을 비롯한 이른바 뜬다는 연예인들이 주인공 또는 패널로 등장하여 방송 내내 끝없는 수다와 개인기를 펼치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는 것이다.
문제는 종종 그들이 타인의 약점을 볼모로 화제를 유발하거나 웃음거리를 만들어 낸다는 데 있다. 이혼이나 성형과 같은 굳이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사를 굳이 들춰 내 상대방을 곤경에 처하게 만드는가 하면 외모와 신체의 결함을 꼬집어 희화화해서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최근엔 미수다에서 루저 발언 파문으로 홍역을 치루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험한 꼴을 당하는 사람도 박장대소하며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가학?피학이 기묘하게 버무려진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솔직히 정신줄 놓은 사람들의 수다방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려되는 점은 시청자들도 그러한 화제유발 패턴에 익숙해지고 무감각해져서 그 부조리한 상황을 가볍게 웃고 넘긴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정말 두려운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바로 그러한 연예프로그램의 상황을 복제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각종 모임에서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좌중을 웃기려 드는 상황을 다반사로 목격한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맞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암묵적인 분위기가 사회 저변에 깔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중학교 때는 군기 잡는다고 체육선생이 때렸고 고등학교 때는 교련선생까지 가세해서 돌림매를 쳐댔다. 맞는 것에서 졸업했다 싶었더니 웬걸 군대에선 맞는 것은 일과였다.
우습지 않은가? 조폭집단도 아니고 제정신을 가진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어렸을 때부터 맞는 것에 아주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이. 우습지 않다. 아주 무섭다.
따지고 보면 맞을 만큼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때리는 사람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때렸고, 맞는 사람은 때리니까 그냥 맞았다.
누가 우리를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불렀는가? 맞아 본 사람이 때릴 줄 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폭력이라는 DNA를 되물림하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이다.
새도매저키즘이 우리네 집단 심리의 기저에 자리하고 있다니! 우리나라가 비교적 치안이 좋고 안전한 나라라 하지만, 사실 알고 보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력의 뇌관 옆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연예 프로그램의 인신공격은 언어로 이루어지는 폭력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에 해를 가하지는 않지만 사람의 마음에 트라우마를 남긴다.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랑비에 옷 젖듯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간다.
그것은 결코 건강한 사회가 지녀야 할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광고인들은 그렇게 막말을 하고 남을 놀려 먹길 즐기는 사람들을 때로는 광고모델로 활용하기도 한다.
연예인이 광고의 중심에 있는 우리네 환경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변명하기엔 우리의 책임이 크다. 우리가 그런 막장문화에 동조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치로 보건대, 그러한 성향의 연예인들은 일반적으로 광고모델로서의 직업의식도 희박하다. 한 마디로 광고를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취급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선 감독이나 PD의 말에 절대 복종하던 그들이 광고 촬영만 하게 되면 불만이 많아진다. 이건 이래서 못 찍겠다 저건 저래서 못 찍겠다…
영화는 예술이라 생각하고, 광고는 자기가 잘나서 얻는 짭짤한 수입원쯤 된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심지어는 방송 도중에‘나 이걸로 광고 좀 들어와야 되는데…’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런 몰상식한 태도를 광고인들이 묵인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바른 어린이가 되라고 아무리 가르쳐 봐야 소용이 없다.
학교보다 훨씬 영향력이 높은 미디어에서 그것도 아이들과 청소년의 시청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연예프로그램에서 남을 비하하고 업신여기는 멘트를 계속 날리는 한 기본 인성 교육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뿐이랴,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 약점을 가진 친구에게 어제 TV에서 본 내용을 그대로 적용해 볼 것이다. 그런 학습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한국사람들을 웃기고 흥겹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들 한다. 특히 별다른 여가 활용 방법 없이 TV를 통해 여흥을 즐기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각종 연예프로그램에서 웬만한 약발로는 흥미를 유발하기가 힘들어졌다.
막장 드라마란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흥미 유발의 강도는 점점 세지고 있다. 자극은 증폭되고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우리 사회가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성인군자의 어록으로 가득 차길 원하진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남을 놀리면서 희열을 느끼는 변태가 득실거리기는 더더욱 원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