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심 끝에 4살 아들과 함께 가족의 핀란드 여행을 결심했다. 이번 여행은 잠깐 일주일 정도 그 나라를 스캔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두 달여 살아보는 것을 여행 목표로 잡았다. 어차피 기억나지도 못할 나이인데 어린아이를 왜 그렇게 고생하면 데리고 다니냐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다.
어떤 책의 내용을 기억하건대 어릴 적 기억이라는 것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야 분명히 안정된 정서로 자랐다는 증거라고 한다. 기억나는 어릴 적 기억을 보면 대부분 충격적이었거나 슬펐거나 불안했던 기억이 가장 선명하고,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부정적인 경험으로 인한 기억들은 언젠가 자라면서 표출되게 마련이라고 한다. 내 아들도 핀란드에서의 추억을 기억 못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안정적인 어린 시절을 만들어준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그 노고의 보상은 충분한 것이 아닐까 싶다.
핀란드에 도착한 일주일은 감옥이었다. 아내와 내가 생각지 못한 것은 어른이 시차에 적응하는 데도 하루 이틀이 걸리는데 아들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고열로 인해 병원을 한 번 다녀온 것 외엔 일주일 내내 숙소 밖을 나가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먹고 때 쓰고 안 자고 마치 신생아 때 한참 고생하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상황 속에서 일주일이 지나가버렸다. 약간의 쌀쌀함과 계속 비만 오던 헬싱키 날씨가 갬과 동시에 아들의 시차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은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다른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동안 최대한 시간을 짜내고 짜내서 하루하루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건만 그 노력은 노력이었을 뿐, 아들이 일어나는 순간 잠드는 순간, 양치를 하는 순간, 화장실을 가는 순간까지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것은 할머니였다. 이곳 핀란드의 집과 환경이 낯설어서라기보다는 늘 옆에 있어 주던 할머니가 없었던 것이 이유가 아닐까? 지금까지 부모로서 합리적으로 아이에게 시간을 투자했다고는 하지만 그건 단지 부모를 위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차 적응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매 순간 함께하던 할머니와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데 일주일이 걸린 셈이다. 결국 아들이 태어난 이후로 지금껏 아들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하루 종일 매일매일을 함께하는 생활이 핀란드라는 곳에서 시작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숙소를 8번 옮기는(결국 이사를 8번 한 셈이다) 번거로움을 감안하더라도 이런저런 다양한 환경을 접해보고 싶었다.(아들이 복병이었지만 일주일 후부터는 괜찮아졌다.) 핀란드 외교부와 핀란드 미녀 '따루'의 도움으로 핀란드의 다양한 보육기관 방문과 이곳저곳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돌아와서 아내와 내가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정리하는 데도 하루가 모자랐다. 아들과 함께 사진을 정리하며 사진을 보여주면 이 장소가 어디였고 이때 만난 사람이 누군지 이름까지 기억해주는 아들을 보며, 잊어버릴 때쯤 영상이나 사진을 주기적으로 보여주면 이 기억들을 영원히 간직하지 않을까? 그럼 언젠가는 고마워하겠지... 라는 어림없는 생각을 잠깐 해보기도 했다.
핀란드라는 나라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넓은 영토에 500만의 적은 인구, 그리고 백야가 있는 짧은 여름과 긴 겨울의 나라다. 핀란드 사람들의 성향과 교육에 대한 관점, 삶의 방식은 결국 이 환경이라는 것과 모든 게 연결돼 있다. 2~3km를 가야 이웃을 만나던 핀란드의 옛 시절로 돌아가보면, 이웃도 얼마 없고 폭설로 인해 교류도 잦지 않다 보니 가끔 만나는 사람에게 인색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을 반가워하고 술 한잔하고 친해지면 무뚝뚝하던 남자들도 말이 많아진다. 눈과 추위 속에서 생존과 직결된 삶을 살다 보니 어른이건 아이건 자생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또 긴 겨울로 인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통나무집에서 시작된 인테리어는 더 정교해진다.(이딸라, 아르텍, 마리메코는 전 세계가 좋아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나머지 시간 역시 집에서 할 일이 없다 보니 독서량도 많아지고(세계 최고 수준의 독서량을 자랑한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긴 시간 동안 인구가 너무 줄다 보니 적은 아이들을 데리고 교육에 투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교육수준이 북유럽에서도 상징적으로 높다.) 지금도 헬싱키 인구가 50만 정도이니 건너건너 아는 사람들끼리 사기를 치기도 힘들었을 거다.(부정부패가 없는 국가로도 유명하다.) 함께 긴 겨울을 잘 준비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기업이건 개인이건 많은 세금을 내더라도 불만이 없는 국민성을 갖게 되고, 그와 더불어 복지도 좋아진 게 아닐까. 이는 핀란드의 자연환경에서 연결 지어본 생각들이다.
직장인은 4시에 퇴근하고 결혼 상대자도 직장이 아니라 클럽활동에서 만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도 한다.(한 외교부 직원은 대한민국은 야근이 많아 대부분 직장에서 배우자를 찾는 걸로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오전이면 수업이 다 끝나고 오후에 받는 과외는 대부분 스포츠 활동을 한다. 게다가 학교에서 등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니 친구들과 경쟁할 필요도 없고 숙제는 단지 열심히 노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아이들이 자라면 최소한 3개 국어 이상을 한다. 도심 곳곳의 아이들 놀이터에서는 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수많은 육아휴직 아빠를 볼 수 있으며 유모차로 다닐 수 없는 곳이 없다. 또한 관광객이라도 쇼핑하면서 물건값을 의심할 일도 없다. 개인 별장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많지만 개인 섬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는 것과 시골을 가도 깨끗하고 깔끔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지내면서 핀란드 사람들을 통해 알게 된 점이다.
핀란드에 오면서부터 아들과 놀아주는 시간이 덧붙어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백야임에도 불구하고 밤 10시만 되면 아내와 나는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체험과 함께 아들과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다.(때로는 처음 만나는 어른들의 어색함을 아들과 이곳 가족의 아이들이 더 가깝게 만들어준 경우도 많았다.) 아들이 아프거나 울며 떼를 쓸 땐 약속을 취소하고 가족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핀란드 부모들은 그 점을 이해해줬다.
이곳에 머물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다림'이 아닐까 싶다. 교육의 목적 자체가 뛰어난 아이를 가려내기보다 뒤처지는 아이들을 기다려주는 것이기도 하고 핀란드의 아빠들도 아이가 우산을 힘겹게 펴며 비를 맞아도 기다려줄 뿐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스스로 행복을 찾기를 바란다. 언젠가 이 아이들도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여행은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 그러나 나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콜라를 한 잔 더 주문하고, 오가는 페리를 바라보았다. 어쨌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p.386
핀란드에 살고 있는 한 한국인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한 부모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회와 환경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한국인 아빠는 지금 핀란드에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교육환경과 이곳을 비교해보면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하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을 부정해버리면 우리는 모두 길을 잃고 만다. 그래서 우리 가족에게도 핀란드의 기억은 경이롭겠지만 더 머물 생각은 없다. 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며 많은 생각의 변화를 함께 가져갈 뿐이다.
그렇게 우리의 여행도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