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History] 최초의 박람회,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일제강점 5년이 지난 1915년 일본은 서울 경복궁에서 한국 최초의 본격적 박람회를 개최한다. 이름은 “조선물산공진회”. “공진(共進)”이란 함께 나간다는 뜻이니 일본이 한국을 강점한 5년 뒤에 같이 발전한 모습을 보인다는 숨은 뜻이 있는 이름이다. 기간은 9월 11일부터 10월 말까지 50일. 예산의 일부는 일본 의회의 승인을 받을 만큼 큰 행사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의 대대적인 조선 합병 선전이었다.
공진회는 치밀하게 계획되었다. 산업, 교육, 위생, 토목 건축, 교통 등 모든 분야를 전시하도록 되어 있었고, 산업은 다시 농업, 임업, 수산업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한국의 경제 뿐 아니라 일본의 경제도 소개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매일신보는 원래 1904년 영국인 배설(裵說. Ernest T. Bethel)이 창간해서 국·영문, 한글판, 한문과 한글 판으로까지 발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합병한 뒤 매일신보(每日申報)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일신보는 유일한 조선어 일간신문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만든 이 신문은 연일 공진회 보도를 했고 아울러 부록도 발행했다. 회장인 경복궁의 조감도와 평면도를 자세히 보도했다. 9월 11일 오전 9시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총독의 개회선언으로 공진회가 개막했다. 관람은 주간과 야간에도 있었다. 밤하늘을 환하게 비친 공진회장은 틀림없는 구경거리였을 것인데 매일신보는 ‘채광의 용궁(採光의 龍宮)’이라 했다. 이 신문에는 연일 공진회 기사와 사진 보도가 있었고 아울러 여러 회사, 상점들의 축하 광고가 즐비했다.
신문 외에도 꽃전차가 거리를 누볐고, 남대문 앞에는 커다란 장식이 있었으며, 세종로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거리는 석탑이 도로 양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는 경복궁과 공진회 회장을 배경으로 그린 멋진 춤추는 천연색 기생 그림이었다. 기념 책자 표지도 기념우표를 포함한 컬러 인쇄였다. 주야간 입장료는 달랐는데 주간이 5전(SN이라는 영어 글자는 아마 ‘전’의 일본어인 SEN일 것이다), 야간이 3전이었다.
행사에는 표창이 따르게 마련인데 출품 25,373점에 대해 심사한 결과 6,965명에 대해 시상을 했다. 그 밖에도 29명에게 공로상을 주었다. 매일신보에는 각 부문별로 심사평이 보도되었다. 입장자의 수는 예상의 3배가 되어 약 120만 명에 이르렀는데 낮에 772,745명, 야간에 391,638명 합계 116만4,383명이었다. 1915년 한국 인구가 약 1,600만 명이었으니 7.5%가 이 공진회를 참관했다는 계산이 되므로 대단한 행사였음은 틀림없다.
박람회란 판촉, 선전, PR이 모두 어우르는 종합 행사이다. 일본으로서는 조선 황제가 살던 경복궁을 박람회장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개방했고 임금이 정사를 보던 근정전(勤政殿)에서 조선 총독이 공진회 개장선언을 했으니 일본이 조선의 새 주인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절호의 찬스였을 것이다. 한 편 이 행사를 위해 경복궁 안에 있던 여러 건물은 철거되었을 것이다. 경복궁이 옛 모습을 되찾는 데에는 9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글 | 신인섭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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