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합병 이듬해인 1911년 6월 7일 매일신보(每日申報)에는 우리말로 쓴 부인다옥 박정애의 ‘고백’이란 광고가 게재되었는데 아직 고백(告白)이라는 말을 사용하던 무렵이었다. 헤드라인은 “한번 구경하시오”. 길지도 않으니 모두 옮겨 본다.
본 다옥(茶屋)에서 동서양 각종 과자와 모과수와 전복과 소라와 아이스크림과 사이다 각종 차도 구비하옵고 처소도 정결하오니 여러 신사와 부인은 찾아오시면 편리토록 수응하겠사오니 한 번 시험하심을 찬민 바라나이다.

1911년이면 아직 여성의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던 무렵이다. 이런 때에 낯모르는 남자들과 같이 커피를 마시러 다방에 간다는 일은 1950년대에 미니스커트를 입으라는 것보다 더 심한 권유인 셈이다. 다방이 아니라 다옥이라 불렀다. 다만 제공하는 음료, 식품도 다양했다. 동서양의 각종 과자와 함께 모과수가 있었고 전복과 소라도 메뉴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사이다는 ‘사이茶’라 했으며 아이스크림은 ‘아이쓰크림’이라 한 일이다. 한글로 쓴 광고에는 “각종 차도 구비하옵고”라는 말이 있는데 과연 커피도 들어 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한국 최초의 다방이었을지도 모를 이 다옥 주인이 박정애(朴貞愛)라는 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다방 이야기가 나와 커피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우리나라에서 커피의 시작은 쓰라린 개화기의 역사와 관련된다. 커피를 맨 먼저 마신 사람은 고종이라 하는데, 1895년 10월 8일 일본 깡패들에게 민비가 시해 당한 이듬해 2월에 황태자와 더불어 지금도 일부가 남아 있는 정동 러시아 공관에서 지낼 무렵이었다. 이 때 고종은 커피를 애용했다고 한다.1902년에는 역시 정동에 현대식 호텔이 생기는데 독일 여성이 경영하는 손탁호텔로 이 2층 건물의 1층 식당에는 커피가 있었다. 손탁호텔은 그 무렵 한국 최고의 사교장인 셈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다옥은 다방이 되었고 커피숍에서 다시 카페가 되었다.
광고가 게재된 매일신보는 일제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모든 우리말 간행물을 없애면서 조선총독부의 유일한 우리말 기관지가 된 뒤였다. 매일신보(每日申報)는 1930년대 말에 每日新報로 제호를 바꾸고 1945년 광복 이후 곧 서울신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