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때때로 깨닫습니다. 이치가 환하게 알아지는 순간이 있어요. 이런 순간과 마주하면 이젠 됐다, 싶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같은 문제로 똑같이 고민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원래의 문제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있어요. 하기사 깨달음이 지속되었다면 저는 벌써 도인(道人)이 되었겠지요. 그래서 또 깨닫습니다. 도인(道人)과 범인(凡人)의 차이는 깨닫고 못 깨닫고가 아니라 지속성의 차이라고.
김형경의 새 책 <만 가지 행동>은 바로 이 지점을 다루고 있습니다. 통찰력 다음 단계랄까요? 아, 하고 머리로 깨닫긴 했는데 행동은 바뀌지 않아 여전히 하던 행동을 계속하고, 그래서 심적 고통이 계속될 때 필요한 것이 훈습이랍니다. ‘훈습’이란 말이 좀 낯설게 들리실텐데, 훈습은 정신분석 과정을 철저히 이행하는 작업을 뜻한답니다. 원래는 유식 불교에서 따온 용어로, 지각과 의식을 통한 경험이 가장 깊은 층에 있는 야뢰야식에 베어들어 저장되는 것을 말한답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에 베어 실제로 행동이 바뀌게 하는 훈련이란 뜻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의 저자, 김형경은 <세월>,<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등의 소설을 써온 중견 작가입니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이 지나면서 긴 방황에 들어섰는데 가만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니 어릴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생존법으로는 성인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가 어렵더랍니다. 그래서 유아적인 자기 자신과 결별하고 온전한 어른이 되기 위한 길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게 바로 심리학 공부였습니다. 몇 년에 걸쳐 정신 분석도 실제로 받았고요. 짧지 않은 세월을 공부하고 방황하고, 마침내는 깨닫고, 변화했으며 이런 천착의 과정을 <사람 풍경>,<좋은 이별>,<천 개의 공감>의 심리 에세이로 펴냈습니다.
김형경 본인도 이제 심리 에세이는 그만 쓰고 본업인 소설로 돌아가야지 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TV에서 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다가 또 한 권의 심리 에세이를 구상하게 되었데요. 가수 지망생인 어느 멘티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선생님은 자신에게 두성을 쓰라고 하는데 참 답답했다, 그걸 쓸 줄 알면 벌써 썼을텐데 어떻게 해야 두성을 쓰는지 알 수 없다고.”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동안 자신이 했던 얘기들이 이랬겠다 싶더랍니다. 예를 들어 의존성을 끊고 분리, 개별화를 이루어야 한다고만 했지,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방법은 말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그 방법에 관해 쓴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저자는 크게 네 가지 방향을 제시하는데 그 중에서도 ‘하던 것 하지 않기’와 ‘안하던 것 하기’가 대표적입니다. 예전엔 두려워서 안하거나 못했을 일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어 보고, 또 너무나 열심히 자신을 몰아붙였던 힘든 일로부터는 자신을 풀어주는 거죠. 또 하나, 작가의 얘기 중에 제가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 있는데, ‘해결하거나 적응하거나’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되 그럴 수 없다면 더 이상 괴로워 하거나화내지 말고 적응하자는 겁니다. 듣고 보면 간단한 얘기인데 막상 그 상황 안에 있을 때는 자주 잊어버리고 스트레스 받고 걱정에 휩싸이곤 하죠. 저는 요즘 이 얘기를 자주 되뇌이고 있습니다.
제 힘으로 해결하는 쪽이 더 많으면 좋겠는데 별로 그렇지는 않아서 아직은 좀 힘이 드네요….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수록, 재능이나 능력 이상으로 태도와 멘탈이 중요하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래서 ‘태도가 경쟁력’이라든가 ‘결국은 멘탈이다’ 같은 말을 후배들에게 하곤 하는데 프로 선수들을 봐도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150킬로를 넘는 강속구를 던지는 투수도, 공 하나가 승패를 좌우하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 강속구를 평소처럼 뿌리지를 못하더군요. 잘못될까 봐 걱정하고 긴장하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그러다 보니 볼이 제대로 컨트롤 되지 않는 겁니다. 결국은 멘탈에서 결과가 갈리죠.
제가 잠시 퍼포먼스에 있어 멘탈의 중요성을 이야기 했지만 김형경이 이런 뜻으로 이 책을 쓴 건 아닙니다. 오히려 유아 시절의 자아(Ego)를 어른이 되어서도 짊어지고 사느라 괴로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제대로 된 인생을 살도록 도와주고 싶어서 쓴 거죠. 게다가 우리는 빨리, 더 빨리 가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데 빨리 가다 보면 정작 자기 자신은 놓치기 쉽지 않나요? 그녀와 함께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최인아의 세상읽기] 만 가지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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