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ㅣ 정혜욱 <맨즈헬스> 편집차장
내가 일하는 잡지사의 편집부 시계는 18일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꿈까지 따라와 괴롭히는 단어, ‘마감’을 기준으로 그렇다. 그렇다 보니 새해 달력을 받으면 가장 먼저 체크하는 것이 ‘빨간 날’의 행방이다. 하지만 기나긴 명절이나 징검다리 연휴는 언제나 촬영과 취재가 한창인 기간에 존재한다. 사이좋게 이어진 빨간 숫자들은 닭살 커플의 애정 행각보다 속을 미어지게 하고 때로는 악마의 목소리까지 듣게한다.
“ 올해는 쉴 줄 알았지? 흐흐흐.” 잡지 밥 먹은 지 십여 년째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만도 한데 그래도 매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달력을 부여잡는 이유는 유럽 여행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대학시절, 그때는 삐삐만큼 흔했던, 유럽 배낭 여행 한 번 해 보지 못한 아쉬움은 나이가 들어도 가시지를 않았다.
유럽 배경의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가 하나 나올 때마다 그 그리움은 증폭됐다. 유럽에 가면 ‘비포 선 라이즈’의 에단 호크를 만날 것 같았고 나는 줄리 델피가 되어 평생 잊지 못할 로맨스로 가슴을 채울 것 같았다. 기차를 놓치고, 노천카페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질리도록 강변을 걷다가 어둠이 내린 광장에서 춤을 추는 그와 나. 이런 상상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한건지…. 유럽 낭만여행은 늘 나의 버킷 리스트 1번 이었지만 잡지쟁이의 삶은 그 리스트를 매번 ‘내년’으로 미뤄두게 했다. 유럽은 멀었고 시간은 늘 촉박했다.
그러다 작년, 워밍업만 하던 오랜 꿈에 드디어 시동이 걸렸다. 극장에서 본 대한항공의 ‘동유럽’ 광고 한 편 때문이었다. 바그너의 클래식 선율을 입은 고성의 아름다운 영상과 봄볕 같은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는 순간, 멎은 줄 알았던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영화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고 머릿속에는 계속 “동유럽, 귀를 기울이면”이라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만 들렸다.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이 광고가 고전 영화의 도입부 같다고 킥킥댔지만 내게는 나를 부르는 분명한 천사의 메시지였다.
궁하면 통하고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나? 작년 추석 연휴는 18일을 지나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었고 우여곡절 끝에 10일이라는 놀라운 휴가를 얻어냈다. 오 마이 갓! 대한항공의 동유럽 광고 시리즈를 따라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을 돌아보고 싶었지만 늦은 예약으로 나는 동유럽 대신 서유럽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즐거웠냐고? 물론이다. 단지 나의 에단 호크는 그 곳에 없었고 가슴에 묻을 로맨스 대신 기차역 소매치기와 9월의 강추위가 뒤섞이며 낭만여행이 흥행 참패로 끝난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유럽 여행의 상처가 거의 아물 즈음, 며칠 전 극장에서 대한항공 뉴질랜드 편 광고를 보게 되었다. 커다란 화면을 통해 펼쳐지는 대자연의 풍광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뉴질랜드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었다.
떠나면 개고생이고 가보면 별거 없는데 그토록 떠남을 갈망하는 우리들. 우리가 찾고 싶은 것은 대자연도 로맨스도 아닌 캡사이신처럼 얼얼한 일상 탈출의 짜릿함이 아닐까 싶다. 지금 나는 2011년 달력을 보며 또 한 번의 탈출 작전을 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