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은 트레킹처럼 환경은 래프팅처럼
글 · 그림 임태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일기획
혹시 최근에 나온 AI 툴들을 써보셨는지. 이미 사용해 보신 분도 많을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AI로 만든 결과물들은 다 보셨을 테죠. 어떻던가요? 놀랍지 않던가요? 실사인지 합성인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업그레이드 속도는 따라잡기 벅찰 만큼 빠릅니다. 이 정도쯤 되면 우리처럼 뭔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면 다들 비슷한 감정을 느낄 겁니다. 공포감이죠.
그 공포감의 근원은 명확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쌓아 왔던 실력의 가치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죠. 오랫동안 연마해 온 노하우와 스킬로, 며칠을 밤새워서 작업해야 하는 일이 프롬프트 몇 줄로,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에 완성되다니요. 그것도 무료로 말이죠.
저도 느끼고 있고, 광고 제작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한 감정일 듯합니다. 이제 솔직히 무서워요. 앞으로 뭐 해 먹고 사나… ㅎㅎㅎ
모든 실력이 다 그렇지만 특히 광고 제작에 필요한 실력은 더디게 성장합니다. 콘셉트의 개념을 잡고, 콘티를 구성하는 스킬을 익히고, 카피와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는 광고 제작 능력은 원래 그런 겁니다. 배우고 익숙해지는 데 오래 걸리죠. 많은 시간과 꾸준한 노력을 투자해서 천천히 쌓아가는, 비유하자면 지리산 종주 트레킹 같달까요. 느리지만 꾸준하게 목표한 지점까지 정진하는, 광고는 그런 일입니다.
실력은 트레킹처럼 천천히 늘어 가는데 환경은 래프팅 하는 것 같습니다. 저 멀리 뭐가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코앞의 바위만 피하고 노 젓는 거죠. 이제 좀 익숙해지나 싶으면 또 새로운 게 나오고, 새로운 게 나오는 순간 유행했던 트렌드는 완전히 잊힙니다. 메타버스, NFT, 버추얼 인플루언서… 불과 한두 해 전에는 지금의 AI처럼 누구나 얘기하던 화두였는데 지금 아무도 언급조차 하지 않죠.
실력은 천천히 느는데 변화는 점점 빨라지고, 그나마 공들여서 만들어 놓은 스킬은 AI가 홀랑 따라잡아 버리고 여러모로 괴로운 요즘입니다.
잠시 시간을 되돌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던 즈음을 돌이켜 보면 그때도 지금과 유사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물론 지금처럼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그때도 프로세스의 변화가 번거로웠고 새로운 환경에서 도태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있었던 거죠.
왜 불쾌한 골짜기 이론 있잖아요? 사람과 유사한 형태일수록 호감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너무 비슷한 시점이 되면 공포감과 불쾌감을 느낀다는 그거.
기술의 발전도 비슷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기술이 좋아지고 작업하기 편해지면 환호하다가 패러다임이 바뀔 만큼 크게 변화하는 시점이 되면 공포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좀 투덜대긴 했지만 아마 이번에도 우리는 잘 적응해 나갈 겁니다. 우리는 광고하는 사람이니까요. 저녁에 맥주 마실 돈으로 AI 서비스들 구독도 좀 하고 늦기 전에 슬슬 공부 좀 해봐야겠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