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난다’는 우아함
TEXT. 서재식 대리
(카피라이터, INNOCEAN Worldwide)
중국부자.
내가 가진 또 다른 별명들 중 하나이다.
팀원들이 말하길,
뭔가 ‘중국부자’스럽게 생겼단다.
혹자는 그래도 ‘부자’처럼 생긴 게 어디야?
라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격렬히 부정했다.
아니, 부정했었다.
조금 더 세련된 이미지를 원했으므로,
내가 이 별명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껴안게 된 것은
5년 전 떠난 여행에서였다.
어찌 된 일인지
여행지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내게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고
한 스무 번쯤의 오해가 반복되자
인정과 더불어 나름의 통계마저 세우게 되었다.
‘아~주로 남방계가 말을 거는 구나‘
‘만세, 그나마 따뜻한 쪽이다’
이렇게.
그럼에도 이런 웃지 못할 해프닝을
겪음에도 나는 떠나는 것이 참 좋다.
떠나는 행위를 시작하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미뤄뒀던 우아한 일들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은
오랜만에 차분히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다.
책이야 언제 어디서든
쉽게 읽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반문하기 쉽지만,
나의 경우에는
이상하게
여행지에서 읽는 책이 훨씬 좋다.
비행기에서 읽는 것도 좋고
잠시 들른 카페에서 읽는 것도
비석이 가득한 공원이나
호텔 욕조에 앉아 읽는 것도 좋다.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는
그 밀도 높은 시간이 좋고
그때 찾아오는
새로운 생각과
새로운 용서와
새로운 깨달음이 좋다.
말하자면,
나는 ‘알랭드 보통’의 다음 문장들을
열렬히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것과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사이에는
기묘하다고 말할 수 있는 상관관계가
있다.
때때로 큰 생각은 큰 광경을 요구하고,
새로운 생각은 새로운 장소를 요구한다.
여행은 생각의 산파다.“
새롭고 큰 광경이 가득한 곳.
그래서 여행지에서 읽는 책은
늘 새롭고 새롭다.
또 다른 별다름은…
‘새벽산책’이다.
말 그대로
낯선 나라 낯선 도시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걷는 것이다.
장점은
사실 꽤 많은데
무엇보다
‘도시의 민낯’을 엿볼 수 있어 좋다.
아직 꾸며지거나
치장되지 않은 도시.
모두가 잠든 시간
신문을 배달하거나
가판대의 먼지를 닦거나
쇼윈도를 정열하며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들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하는 어떤 ‘정겨운 위안’이 든다.
새벽산책의
또 다른 매력은
보물 같은 ‘거리’를 찾는 일이다.
라구나 비치의 한적한 ‘오솔길’도
스톡홀름의 마법 같은 ‘언덕’도
모두 새벽산책 중 찾은 행운이었다.
최근에 발견한 보물은
헬싱키의 ‘수오미 해변’이다.
아침 운동 겸
트레이닝복에 운동화를 신고
무작정 숙소 주변을 걸었는데
건물들로
빼곡한 거리를
오르고 내리고
돌고 돌다 보니
어느 순간.
‘탁’하고 나왔다.
‘파란바다가’
‘평생 기억하게 될
보물 같은 광경이‘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새벽이 주는 고요함과
그 고요함 속에 찾아오는
기적 같은 광경.
가히 결정적이라
말할 수 있는
새벽의 ‘시간’들이 나는 참 좋다.
책 읽기와
새벽 산책 말고
최근에 시작한 또 다른 일은
벼룩시작을 찾는 일이다.
나의 경우,
‘백화점’보다는
‘시장’ 쪽을 둘러보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한데,
‘손때 묻은 사연’들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
뜻밖의 흥정도 재미있다.
그 중 가장 큰 즐거움은
중고LP판을 사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뮤지션의 음반을 찾는다.
집에 LP플레이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비영어권의 음반은 가수도 알지 못하지만
(사실, 영어권 앨범이라고 사정이 딱히 다르진 않다)
마치, 보물을 찾듯
한 장 한 장 ‘손품’파는 재미는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렇게 들을 수도 없는 LP판을
잔뜩 산 날에는
어김없이 Jazz Bar를 찾는다.
그런 밤이면,
이를테면
무엇이든
듣고 싶은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행하는 모든 나라의
유명 ‘Jazz Club' 반문을
하나의 목표로 삼고 있는데
올해에는
스웨덴의 'Faching'과
덴마크의 'Copenhagen
Jazz House'를 방문했다.
현지인들로 가득 찬 곳에
홀로 테이블을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자니,
왠지 미안하고 긴장도 되었지만,
그것도 잠시,
연주가 시작되자
“역시~이거야~!”
라는 감탄사만 연신 내뱉게 되었다.
낯선 도시에서
그 나라의 감성과 표정을
듣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완벽하다.
언젠가,
누군가 말했다.
사실 여행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새로운 것을 보려는 마음만 있다면
좁은 방 안에서도
얼마든지 여행을 떠날 수 있다고
그러나 우리는 안다.
그럴 수 없음을.
그러기 쉽지 않음을.
어쩌면 여행은
우리가 그동안 미뤄두었던
지극히 평범한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는지도 모른다.
비범한 곳에서의
평범한 행위들.
예를 들면,
최선을 다해
거리를 걷고
풍경을 보고
먹고
마시고
듣는
그런 일들.
확실히
‘떠난다’는 것에는
어떤 ‘우아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