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무단정치기 매일신보 광고(1910~1920)
09 춘계광고학술심포지엄 | 한국광고학회 | 8 pages| 2009.05.26| 파일형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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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요약
1910년 8월 30일 한일합방이 공포된 후 일제 무단정치시대로 변화되면서, 언론사적인 측면에서는 친일지의 독점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같은 해 일본은 총독부에 임시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1912년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토지조사 사업은 현실적으로 경작자들의 전통적 경작권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결국 토지는 일본인 회사나 개인의 소유가 되면서 새로운 일본인이 대주주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로인하여 한국인은 점점 영세 농민화되어 결국에는 1916년 통계에 의하면 264만호 중 2.5%가 지주, 20%가 자작농, 자작농겸 소작농이 40.6%,순소작인이 36.8%로 나타났다. (국사교육연구회, 1993)
식민지 지배의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정책들을 실시해온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으로부터 경제적 잉여를 수탈하기 위해 구체적인 정책들을 수행해 나갔다. 일본은 한국을 식량공급지, 원료공급지, 상품판매 시장으로서 판단하고 있었다. 1910년 수출 총액의 77.2%, 수입총액의 63.7%를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다. 수출입품의 구성을 보면 쌀을 비롯한 1차 산품(식량과 원료)이 주된 수출품이 되고, 2차 산품(완제품)이 주된 수입품이 되었다. 한국은 일본 공산품의 소비시장으로 점차 예속 경제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의 인구 상황을 보면 1910년에 1,742 만명, 1915년에 1,765 만명, 1920년에 1,900 만명으로 나타났다. 1910년에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171,534명으로 전체인구의 1% 미만이었으나 1920년 에는 347,850명으로 2% 수준까지 증가했다. 1910년에 만주에 거주하는 한구국인 수는 200,000명으로 추정되며 1925년에는 533,000명으로 증가 되었다. 1917년 산업별 인구구성을 보면 농림업이 85.1%, 상업, 교통업이 5.4%, 광무업 2.6%, 기타 2.2% , 공업이 2.0%, 공무,자유업이 1.4%, 수산업이 1.2%로 나타났다.
1918년 조선총록부가 조사한 농가 경제상황을 보면 전국적으로 상류 농가가 1,061원, 중류농가가 101원, 하류농가가 5원의 평균 흑자를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920년 반농민적 농업정책으로 변화돠면서 대부분의 소작농가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신용하 외 2인, 1995) 1911년부터 1917년 동안에 수출은 1,886 만원에서 8,377 만원으로 수입은 5,409 만원에서 10,289 만원으로 급증하였다. 수입된 물건은 콘덴스트, 밀크, 청주, 맥주, 구두, 모자, 자전거, 각종 담배, 비누, 의약품 등이었다. 이 시대의 주요 광고품목으로는 라이온치약, 인단, 아지나모도, 대학목약(大學目藥), 중장탕(中將?) 및 각종 일본 맥주광고가 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국내의 광고업종으로는 한약계열의 의약품, 화평당, 조선매약, 모범약국, 서적출판물 등이 주된 품목이었다(신인섭· 서범석a, 1998).
목차
1. 개관

2. 광고 매체 환경의 특성

3. 광고현황
1) 매일신보의 광고형태
2) 매일신보의 광고크리에이티브 형태

4. 결론

참고문헌
일제무단정치기 매일신보 광고 소비시장 일본맥주광고 광고업종 광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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