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나는 편집적 기억상실증이 있다. 광고 집행이 끝나고 새로운 광고를 맡으면 과거의 기억이 깔끔하게 리셋(Reset)된다. 직업에 따른 일종의 희귀병 같은 것으로 그때 슬로건이 뭐였는지, 어떤 모델을 썼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진다. 심지어는 PT가 끝나고 내려오면서 그 날의 Key Copy를 까먹은 적도 있으니 내가 봐도 놀랍다. 덕분에 나는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현재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어 편하긴 하지만 이렇게 촬영 뒷이야기를 글로 써달라고 하면 막막해진다. 그때 어땠었지? 무슨 일이 있었지? 어떤 걸로 논쟁이 있었지? 천천히 기억 속에 가둬놓고 있던 그날을 슬몃슬몃 끄집어내본다.
글 ㅣ 권현선(크리에이티브솔루션4팀 팀장)
2011년 1월 13일 촬영일. 아트 디렉터는 전날까지도 포토 그래퍼, 메이크업, 스타일리스트와 최종 협의를 하느라 신경이 날카로웠다. 패션이나 뷰티 촬영은 작은 소품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지고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다. 게다가 이번에는 작년 F/W 킬블랙 펜라이너의 인기 몰이에 힘입어 킬블랙 펜라이너, 펜슬라이너, 브러시라이너를 합쳐 ‘클리오 워터프루프 킬블랙 아이라이너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3페이지 스트레이트 잡지광고까지 준비해야 했기에 부담감은 더욱 컸다. 아침 일찍, 촬영을 위해 나서는 길. 모델 에이전시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이효리 씨가 길 고양이한테 물려 응급실에 실려갔어요!”
촬영 당일,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이런 얼토당토않은 초난감 플레이는 처음. 촬영은 지연됐고 우리는 모두 안절부절. 오늘 촬영해야 할 메이크업 룩이 5개나 되는데… 게다가 이게 보통 촬영인가? 모델이 가장 아름답게 나와야 하는 뷰티 촬영 아닌가? 촬영자체를 접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감까지 몰려왔다.
사건의 개요는 이러했다. 동물 애호가인 이효리. 늘 돌봐주는 길거리 고양이가 있었다. 그날 아침도 어김없이 그 고양이에게 밥을 주고 있자니 그 녀석 몸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더란다. 동물병원에 한 번 데려가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안아서 트레이로 옮기려는 순간, 거친 길고양이 본성 발동. 주인(?) 마음도 몰라주고 그녀의 손을 꽉 깨물어버렸단다. 대한민국 최고의 여가수가 손수 밥을 챙겨주는 것도 감지덕지건만 물기까지 한 이 간 큰 고양이 같으니…. 이효리의 따뜻한 마음이 참으로 감동적이긴 한데 신이시여, 왜 하필 오늘이냐고요?
예정 시간 오전 11시에서 2시간이 지난 오후 1시경, 이효리가 촬영장에 도착했다. 의외로 밝다. 다행이다. 물론 손가락 끝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놓은 모습이 당시의 다급함을 대신 말해줬다. 저 정도 손가락쯤이야 뭐… 우리에겐 CG가 있다! 오히려 지난번 촬영보다 밝은 모습이 털털한 그녀답다. 게다가 오늘의 에피소드를 조잘조잘 스태프에게 늘어놓기까지. 그날 응급실에는 또 한 명의 응급 환자가 있었는데, 개에게 물린 입술이 주먹만 하게 부어올랐다는 섬뜩한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친절한 효리의 상처가 얼굴이 아닌 손가락임을 온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D